산업사회 기계 문명에 떠밀렸던 인간의 수작업이 가장 고귀한
디자인 수단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도구적 인간에 대한 재성찰이 진행되는 것이다.》
○ 패션 DIY족의 출현
![]() |
장우철씨(29·남자 잡지 GQ코리아 기자)는 늘 독창적 옷차림으로 주변의 주목을 받는다.
남과 똑같은 모습을 거부하는 그는 평범한 옷을 앞에 두고 자주 발명의 고민에 빠진다.
그의 DIY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재봉틀 작업은커녕 바느질도 익숙하지 않아 오로지 가위로 옷을 자르는 방법을 택했다. 해체주의(Deconstructivism)인 셈이다.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검정색 투 버튼 모직 재킷은 아래쪽 단추 바로 밑에서 물결모양으로 짧게 잘랐다. 베이지색 안감이 재킷의 투박한 커팅선을 따라 슬쩍슬쩍 내비쳤다.
평범한 티셔츠에 핀과 클립을 수십개 달거나, 재킷의 위쪽 칼라와 소매를 거칠게 잘라내 조끼로 변형시켰다. 셔츠의 왼쪽 가슴 포켓 일부를 잘라내 U자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는 정식으로 패션을 공부한 적은 없다. 대신 영국 패션 잡지 ‘i-D 매거진’ 등에서 마르탱 마르젤라, 타라 서브코프 같은 젊고 독창적인 디자이너들의 옷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편의점에서 흰색 메리야쓰 두 세 장을 사다가 목과 팔 둘레를 잘라낸 뒤 겹쳐 입으면 멋있어요. 오래전 유명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컬렉션에서 비슷한 연출을 봤죠. 찢고 자른 패션이 싸구려로 보이지 않으려면 나머지 소품은 최대한 품위 있게 절제시킵니다.”
윤정빈씨(27·이화여대 대학원생)는 3년 전부터 손수 액세서리를 만든다. 서울 동대문 종합상가 5층과 을지로 6가 서울벤터타운에서 재료를 구한다. 한 개에 500∼1000원 하는 원석과 크리스털을 적절히 섞으면 ‘나만의’ 목걸이와 귀고리가 탄생한다. 비용은 완제품을 사는 것보다 10분의 1밖에 안 든다. 액세서리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인 윤씨는 아예 공구를 완벽하게 갖추고 조만간 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러나 공구가 없어도 액세서리는 쉽게 만들 수 있다. 동대문 일대 상가에는 복잡한 제작 과정 없이 손쉽게 접착제만으로 액세서리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이 널려 있다. 요즘에는 남자들도 이 곳을 많이 찾는다.
김민정씨(29·회사원)는 화장품 브랜드 사은품으로 받은 가방을 리폼해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청바지에서 잘라낸 천 조각들을 연하늘색 인조 가죽 가방 위에 마음 내키는 대로 접착제로 붙였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흰색 가방에도 슬라이드 필름 여러 장을 붙여 팝아트 분위기를 냈다.
전광옥씨(52)는 10여년동안 취미로 손수 만든 액세서리와 인테리어 소품을 모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에뚜와’라는 가게를 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수집한 옛날 베개의 자수를 떼어내 액자로 만들거나, 황학동 시장에서 구한 옛날 옷을 현대적으로 리폼한다.
손재주가 없다고 걱정할 이유는 없다. 시간과 기술이 부족한 패션 DIY족은 수선 가게를 십분 활용한다. 압구정동 일대 성업 중인 명품 수선 가게에는 명품 가방에 캐릭터 문양을 장식해 달라는 주문, 명품 옷을 자신의 스타일로 리폼해 달라는 주문이 줄을 잇는다.
아직도 획일화된 명품으로 명품 이미지를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트렌드에 뒤처져 있는 것이다.
○ 패션 디자이너의 의도된 DIY
요즘 패션계의 화두는 ‘기성품에 어떻게 사람의 손맛을 내느냐’이다.
대부분의 국내외 기성복 브랜드들은 평범한 티셔츠 어깨 부위에 손바느질을 하거나, 비즈와 레이스를 달거나, 일부러 끝단을 손으로 거칠게 찢어낸다. 완벽한 박음질보다 엉성하게 자르고 꿰맬수록 스타일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국내 패션계의 주목을 받는 신인 디자이너 서상영씨(33)는 리폼을 통한 DIY 작업을 디자인 컨셉트로 삼는다.
서로 다른 색상과 디자인의 리바이스 진 재킷 두 장을 반씩 잘라 맞붙여 한 벌의 옷을 완성하는 식이다. 단추를 잘못 끼운 것처럼 왼쪽과 오른쪽의 길이를 일부러 다르게 한 셔츠도 있다. 슬리브리스 티셔츠 세 장을 일렬로 박음질해 가운데 티셔츠는 몸통, 좌우 티셔츠는 어깨 부위가 파인 소매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옷 라벨은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견출지 모양이다.
“견출지 안을 그대로 비워두어도 좋고, 쓰고 싶은 말을 써도 됩니다. 샤넬이라고 써도 좋고, 자신의 이름을 써도 좋습니다.” 그가 DIY 작업으로 만든 옷을, 입는 사람이 또 다시 DIY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한 그는 ‘옷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만 떨쳐내면 누구나 창조적인 옷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외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DIY가 이제야 국내 패션 분야에서 싹트고 있다고 평가한다.
패션 DIY족의 출현은 최근 디자이너 고유의 색깔을 강조하는 패션 트렌드와 맥을 같이 한다.
마르탱 마르젤라, 드리스 반 노튼 등 벨기에 로얄 아카데미 패션 스쿨 출신 디자이너들과 존 갈리아노, 스텔라 맥카트니 등 영국 세인트 마틴 스쿨 출신 디자이너들이 전 세계 유행을 선도하는 양 축.
이들은 단정하고 정형화된 옷을 거부하고 과감한 입체 커팅과 트리밍, 다양한 패치워크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패션 DIY족이 자신이 내키는 대로 옷을 해체, 재구성하는 작업과 같다.
○ 세상에 단 하나뿐
덕성여대 의상디자인학과 장동림 교수는 평소 기성복 재킷을 사면 단추를 바꿔 달거나 손바느질로 홈질 스티치를 넣는다. 이유는 명쾌하다.
“학생들과 똑같은 옷을 입을 수는 없잖아요.”
‘나만의 스타일’을 원하는 고객을 잡기 위해 패션업체들도 달라지고 있다. 루이뷔통 등 명품 브랜드는 고객이 원하는 이니셜이나 그림을 제품에 그려 넣어준다. 나이키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고객이 직접 원단, 색상, 디자인 등을 골라 제작 주문할 수 있게 한다.
서울 갤러리아 백화점 압구정점 명품관 바이어 이주원씨는 말한다.
“국내 명품 시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명품 고객이 세분화하고 있습니다. 카날리, 제냐 등 수입 의류 브랜드들이 지난해 말부터 일대일 맞춤 서비스를 크게 확대하는 이유죠. 맞춤 서비스 수요는 조만간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패션과 디자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증가하면서 늦깎이 패션 공부도 늘어난다.
모엣 헤네시 코리아 김정은 홍보팀장(30)은 전공이나 업무와 상관없는데도, 몇 년 전 에스모드 서울과 영국 세인트 마틴 스쿨을 다녔다.
“예쁜 옷을 찾다가 본격적으로 배워서 만들어 입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재봉틀 작업 중 손톱이 상해도, 창조하는 즐거움이 가슴 가득히 넘쳐 났어요.”
20세기 대량생산 대량소비에서 시작한 획일적인 유행은 21세기 들어 개별화된 문화 체험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디자인에 대한 불필요한 외경심이 사라지면서 대중 스스로가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개념 미술가 바바라 크루거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고 썼던 말을 이제는 ‘나는 만든다, 고로 존재한다(I Make, therefore I Am)’로 고쳐 써야 하는 시대가 왔다.
글=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