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어느 해 여름 청탁드린 원고를 받기 위해 선생 댁을 찾았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모시 적삼을 곱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맞아 주셨다. 자택 가득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배어 있었다. 선생은 차 한 잔을 권하며 세상을 걱정하셨다. 원고지의 필적(筆跡) 또한 선생처럼 단아했다. 제자의 제자뻘인 젊은 기자에게 시종 말을 높이셔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기억이 난다.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이 아파트 경비실에 원고를 맡겨 놓거나 부인을 시켜 문 사이로 원고를 건네주던 때였다.
▷선생은 종고조부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의 가르침을 받았고,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에서 깊은 감동을 받아 역사학도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이화여대 서강대 한림대 등에서 40년가량 후학을 지도했고, 특히 서강대에서 22년간 재직하면서 전해종(동양사) 길현모 차하순 교수(서양사)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4번에 걸쳐 고쳐 쓴 선생의 ‘한국사신론’은 한국인의 역사책이요, 입시생과 고시생의 필독서였다.
▷선생은 사료(史料)에 의한 실증이 뒷받침되지 않는 역사는 단호히 배격했다. 이로 인해 해석을 중시하는 국수적 민족사학자들에게서 일제의 식민사학을 계승했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진리를 거역하면 민족도 망하고 민중도 망한다”는 것이 선생의 지론이었다. 몇 년 전 병세가 깊어지자 그는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낫다”며 마지막까지 집필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사학은 선생에게 큰 빚을 졌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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