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문정희,“먼 길”

  • 입력 2004년 6월 4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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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

-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 를 발음해 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중에서

세상에 신이 둘이 있는 줄을 다시 알겠다. 전능하사 머리 위에서 굽어보는 신과 평생을 달아나도 뒤꿈치 잡고 쫓아오는 발 밑신(문명인인 우리는 하루 천 리를 가도 겨우 신발 속에 갇혀 있다).

아니다, 그 둘만 신인 줄 알면 사원을 잘못 찾았다. 아래로 달아나도 신이요, 위로 솟구쳐도 신이라면야 평생 맷돌 사이에 낀 무른 메주콩이 아니겠는가? 저 먼 길을 돌아 비로소 깨닫나니, 신과 신 사이에 다시 신이 있다.

하늘과 땅과 저 자신, 지붕과 기둥과 주추가 모두 신인 저 놀라운 사원을 보라. 신 밖에 신이 없고 신 속에 신이 있으니, 세상 만유가 신이며 저 또한 신 자체가 된 사람을 보라. 그러나 ‘어디에도 아는 길’ 하나 없이 새 신 꿰고 길 떠나는 저 외로운 신을 보아라.

(신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기도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내가 나의 사원이며 나의 신이니 나에게 간절히 경배할진저! 신은 자신의 우주를 한눈에 보기 위해 곳곳에 작은 사원을 만들었다. 꽃 한 송이,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담긴 것은 그 때문이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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