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雪嶽의 질풍노도, 숨이 멎는다… 김종학 개인전

  • 입력 2004년 6월 13일 17시 58분


튜브에서 금방 짜낸 유화안료를 캔버스에 짓이기 듯 진득진득하게 그린 오만가지 꽃, 새, 벌레, 나비들. 지글지글 타는 듯한 원색의 난무에 어지럼증이 인다. 김종학 작 ‘설악의 폭포주변’, 1999년. 사진제공 갤러리 현대
튜브에서 금방 짜낸 유화안료를 캔버스에 짓이기 듯 진득진득하게 그린 오만가지 꽃, 새, 벌레, 나비들. 지글지글 타는 듯한 원색의 난무에 어지럼증이 인다. 김종학 작 ‘설악의 폭포주변’, 1999년. 사진제공 갤러리 현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 옆 건물 1층에 마련된 김종학 화백(67)의 임시 작업실에 들어섰다. 골판지가 깔린 바닥은 여기저기 물감튜브들로 어지럽고 책상 위에는 생수통과 먹다 남은 과일들이 놓여 있다. 작업할 땐 으레 클래식음악을 틀어 놓는 김 화백의 습관대로 한 구석 작은 오디오에서 음악이 크게 흘러나오고 있다.

●설악산 들어가 산 지 25년

흰 윗옷에 검정바지를 입은 김 화백이 나타났다. 큰 체구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여전하다. 지난해 5월 서울 예화랑 전시 때 보았던 모습보다 피부가 더 맑아졌고 살도 빠졌다. 며칠 전 부인이 팔에 부상을 입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간호를 하느라 부득이 속초 작업실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김 화백은 17일부터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설악의 사계(四季)’전(7월 4일까지)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염천(炎天)에 겨울풍경을 그려야 하니, 고문이야 고문”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의 등 뒤로 완성 단계의 대작 두 점이 보였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듯한 화면에 숨이 막힐 것 같다. 튜브에서 금방 짜낸 유화안료를 캔버스에 짓이기듯, 화면에 진득진득하게 그려 놓은 오만가지 꽃, 새, 벌레, 나비 …. 타오르듯 하는 원색의 난무(亂舞)에 어지럼증이 인다. 나뭇가지와 등걸로 뒤얽힌 숲 속 이름 모를 꽃들은 만지고 싶을 만큼 촉각적이고,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들과 폭포수에선 소리가 들리는 듯 청각적이다.

올해는 김 화백이 설악산에 들어가 산 지 꼭 이십오년 되는 해다. 인생살이에서도 예술작업에서도 가장 깊은 실의에 빠졌을 때, 쫓기듯 내려간 설악에서 지친 맹수처럼 숲 속을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산, 꽃, 풀을 그려왔다. 설악의 4계절을 담은 40여점이 전시되는 이번 작품전은 ‘살아 있는 김종학 회고전’이라 할 만하다. 이를 기념해 출판사 열화당에선 그의 첫 작품집 ‘김종학이 그린 설악의 사계’를 펴냈다.

“김 화백의 그림을 보면 안도감과 편안함이 느껴진다”는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그림이 실종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이 시대에 그의 작품 어딘가에선 회화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예술가를 키우는 8할이 ‘광기’라고 한다면, 김 화백은 딱 이에 걸맞다. 그는 그리고 싶지 않을 땐 아예 붓을 놓고 지내다 그릴 만하다 싶으면 질풍노도처럼, 밤을 꼬박 새워 그리는 직정(直情)의 화가다.

●한번 붓들면 미친듯 밤새 그려

자신의 작품 앞에 앉은 김종학 화백. 허문명기자

그의 광기가 발휘되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골동품 수집’이다. 돈만 손에 쥐었다 하면 골동품을 사들이는 바람에 아내에게 통장마저 빼앗겼다. 그럼에도 그는 30여년간 목가구, 도자기, 보자기, 골무 같은 민속품들을 수집해왔다. 고미술품을 보는 그의 심미안은 화단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

개인전 기간 중 김 화백은 갤러리 현대 옆 금호미술관 3층 전관을 사재로 빌려 자신이 수집한 목기와 민예품 등 70여점을 선보이는 특별전도 갖는다. 그는 목 가구 값이 치솟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1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목가구 300점을 기증한 바 있다. “아름다움은 나누는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을 이번에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02-734-6111∼3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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