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7>국학진흥원의 ‘만인소’

  • 입력 2004년 6월 14일 18시 29분


조선시대 정치는 사림의 공론(公論)에 토대를 두고 운영됐지만, 관료가 아닌 유생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상소(上疏)뿐이었다. 그들은 대궐 앞에 무리를 지어 왕의 비답(批答)이 내려질 때까지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선조(宣祖)대에 붕당정치(朋黨政治)가 확립된 뒤부터 정치세력들은 유생공론을 앞세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정계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서인 또는 노론정권을 견제하는 장치로 유소(儒疏)를 자주 이용했다. 영조는 유소의 정치적 악용을 막기 위해 모든 유소는 성균관 유생들의 대표인 장의(掌議)의 동의를 거친 다음 올리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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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는 노론계 유생들이 성균관을 주도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남인의 공론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인들이 이를 돌파하기 위한 방안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만인소(萬人疏)’였다. ‘만인’은 모든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만인소 자체가 공론으로 검증되는 만큼 장의의 확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만인소는 도산서원(陶山書院) 광명실(光明室)에 소장돼 있던 원본으로 2003년 4월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된 것이다. 이 상소는 철종 6년(1855년) 5월 이휘병(李彙炳)을 소두(疏頭)로 해서 영남 유생 1만432명이 연명해 올린 것으로, 뒤주 속에서 죽음을 당한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일)할 것을 청원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이는 국가의 의리를 바로 세우는 일과 직결된다”며 장헌세자의 존호(尊號) 올리는 의식을 거행할 것을 촉구했다.

소문(疏文)에 이어 연명한 유생들의 명단이 한 줄로 적혀 있는데, 만명이 넘는 숫자이다 보니 소문을 포함한 상소장의 길이만 해도 96.5m에 이른다.

그러나 이 상소에 대해 왕은 비답 대신 승정원에 “되돌려주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렸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 문제를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장헌세자 탄신 120주년에 맞춰 올린 이 상소는 비록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영남유생들을 결집해 내는 역할을 했다. 뒷날 영남유생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응해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한 또 다른 ‘영남만인소’(1881년) 역시 이런 정신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설석규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한국사

유교 10만 대장경 수집

한국국학진흥원과 동아일보가 함께 ‘유교 10만 대장경’ 수집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각 문중에서 보관 중인 목판을 위탁 받아 현대적 보존시설을 갖춘 국학진흥원 내 장판각(경북 안동시 도산면)에 정리·보관합니다. 054-851-0768


1855년 영남 유생 1만432명이 연명해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청원했던 ‘만인소’. ‘만인소’는 공론정치를 표방했던 조선시대 정치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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