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피플]‘아는 여자’ 첫 주연 정재영 “저 ‘아는 남자’ 맞죠?”

  • 입력 2004년 6월 15일 17시 14분


장진 감독의 새 영화 ‘아는 여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별 볼일 없는 야구 선수로 변신한 정재영. 김미옥기자
장진 감독의 새 영화 ‘아는 여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별 볼일 없는 야구 선수로 변신한 정재영. 김미옥기자
《‘그’를 몰랐다. ‘박봉곤 가출사건’부터 시작해 ‘조용한 가족’,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피도 눈물도 없이’ 등 10편의 영화 속에서 배우 정재영(34)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의 존재감이 느껴진 것은 ‘실미도’의 거칠고 의리 넘치는 수컷 ‘한상필’에 이르러서였다.

정재영이 장진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아는 여자’(25일 개봉)로 사실상 첫 주연을 맡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별 볼일 없는 프로야구 선수 동치성으로 변신했다. 치성은 자기 집에서 서른아홉 발자국 떨어진 이웃집에서 함께 성장해 온 그냥 ‘아는 여자’ 한이연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장진 감독도 변했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렸다. 엇나가던 상상력은 따뜻하고 섬세해졌다. 이 영화는 한 상황에서 감동과 유머를 동시에 뽑아내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작법에서 벗어난다. 감동을 우선 ‘먹인’ 뒤 생뚱맞은 대사나 설정을 덧붙여 눈물과 웃음을 징검다리처럼 배열한다.정재영은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지 않은 나의 첫 영화”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알고 보니 그도 ‘아는 배우’였다.》

○ 아는 남자

내 몽타주(얼굴)에 감사한다. 한 번 보고 2개월 지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얼굴이니. 10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나를 알아보기란 ‘숨은 그림 찾기’ 같을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딸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옆 가리마의 남자를 기억하는가. 그게 나다. 내 얼굴은 잘 생기지도, 아주 못 생기지도, 터프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다. 난 가늘고 길게 살자는 쪽이다. 관객들이 몇 년간 즐겨 찾다가 ‘이제 질렸어’ 하고 버리는 배우가 되고 싶진 않다. ‘실미도’ 촬영장에 동네 주민들이 몰려왔을 때 설경구 선배를 바로 옆에 두고도 한참 찾더라. 이런 평범한 얼굴이 설경구란 배우의 힘이 아닐까.

내 얼굴은 멜로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는 여자’에서 남 주인공은 잘 생기면 안 되는 남자, 별 볼 일 없는 남자 캐릭터라서 내가 맡을 수 있었다. 사실 난 정통 멜로나 성인물에 출연할 신체적 준비가 덜 돼 있다. 몸에 털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 모르는 이름

본명은 ‘정지현’이다. 연극판에서부터 무명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크게 못 될 이름”이라는 주변의 지적에 마음이 걸렸다. 장모님이 “배우 이름으로는 최적”이라며 ‘김재영’이라는 이름을 지어오셨다. 차마 성(姓)은 못 바꾸고 ‘정재영’으로 바꿨다. 원래 한자는 지금과 달랐는데 도장 파러 갔을 때 주인아저씨가 ‘말도 안 되는 획수’라고 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즉석에서 권한 대로 ‘있을 재(在), 읊을 영(詠)’으로 바꿨다.

연극판을 전전하던 시절, 연간 수입은 200만 원 안팎이었다. 하루는 종일 조명 스태프를 하고 5만원을 벌었다. 당시 연애 중이던 아내(김정은·99년 결혼)와 난생 처음 레스토랑에 갔다. 대충 속으로 계산해 5만원 이내로 음식을 시켰는데 계산서에는 5만4500원이 찍혀 나왔더라. 아뿔싸. 부가세가 붙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내에게 5000원을 꿨다. 아내는 내가 한 이동통신 회사의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기획사에서 우리가 일 잘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직원이었다.

○ 아는 여자

이나영이 정재영을 짝사랑한다는 설정이 말도 안 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나영은 TV 드라마에서 ‘심지어’ 양동근과도 사랑했던 배우다. 이나영은 자신을 ‘여배우’가 아닌 ‘배우’라고 생각하는 예쁜 배우다. 촬영장에서 나보다도 거울을 안 봐서 충격 받았다. 촬영기사가 “저기 (이나영) 머리, 어떻게 좀 해보지?”라며 신경 써 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나영에게 미안하다. 남 주인공인 내게 상업적 이미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극중 한이연은 울먹이며 말한다. “아저씨는 영리하거나 잘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잖아요.” 맘에 썩 드는 대사는 아니지만, 나를 퍽 잘 나타내는 대사란 생각이 든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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