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한 마을 100여 가구가 같은 날 제사를… ‘자전거’

  • 입력 2004년 6월 21일 17시 52분


한국인들이 겪었던 수난과 어두운 운명의 이미지를 현실과 환영의 이야기로 얽어낸 ‘자전거’. 사진제공 목화레퍼터리컴퍼니
한국인들이 겪었던 수난과 어두운 운명의 이미지를 현실과 환영의 이야기로 얽어낸 ‘자전거’. 사진제공 목화레퍼터리컴퍼니
1983년 10월 경남 거창의 면사무소. 한동안 결근했던 윤 서기가 사무실에 나와 결근계를 쓰고 있다. 그가 ‘길가에 암장된 처녀가 야밤에 길가는 사람 불러 잡는 바람에 졸도, 이후 경기로 눕게 되어 42일간 출근이 불가했다’는 황당한 사유서 초안을 동료인 구 서기에게 보여준다. 구 서기는 40여일 전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 서기를 채근한다.

이렇게 연극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목화 레퍼터리컴퍼니의 ‘자전거’(오태석 작·연출)는 오늘과 42일 전, 6·25전쟁까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현실과 기억 그리고 환영(幻影)이 엇갈리는 독특한 형식으로 집단과 개인의 비극, 시간의 의미를 되묻는다.

1983년 동랑레퍼토리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이번에 목화 창단 20주년 기념작으로 다시 선보였다. 한 마을에 사는 100여가구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야 하는 비극을 남긴 전쟁의 상흔,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한 문둥이 가족의 삶을 통해 개인의 상처를 두루 짚어보는 작품이다.

검은색 천으로 뒤덮인 단순하고 상징적인 무대는 어두운 조명, 절제된 음악과 어우러져 여러 죽음과 비극에 숨어있는 미스터리를 더욱 부각시킨다. 여기에 정진각, 이명호, 조은아씨 등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사실 이 연극은 다소 난해하고 모호하게 다가온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심인물인 윤 서기의 기억과 무의식이 토막토막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는 동안 그리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말이 한몫하기 때문. 언어는 작가 오태석씨의 연극을 규정짓는 주요 요소로 꼽혀 왔다. 그는 원래 충청도 사투리로 발표했던 이 작품을 경남 거창 사투리로 다 바꾸었다. 우리의 정서와 숨결이 스며든 구어체 대사는 주제의 무거움을 덜어내고 이야기의 현실감을 더해준다.

그냥 웃고 즐기는 오락성만 강조한 연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자전거’가 보여주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혹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장 문을 나설 때면 왠지 뿌듯하다. 천천히 공들여 만든 ‘슬로 푸드’처럼 만든 사람들의 정성과 품이 느껴지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7월 4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룽구지 극장. 화∼금 오후 7시반, 토 오후 4시반 7시반, 일 오후 3시 6시. 02-745-3967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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