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8>향산 이만도의 ‘청구일기’

  • 입력 2004년 6월 21일 18시 40분


‘청구일기(靑邱日記)’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후손인 진성 이씨(眞城 李氏) 집안의 유학자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1842∼1910)가 대한제국이 망한 뒤 ‘청구동’(경북 안동시 예안면 소재)에서 24일간 단식하다가 순국에 이른 과정을 주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일기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자 이만도가 청량산과 일월산으로 들어가 죄인을 자처하며 유랑했던 내용에서 시작한다. 그가 이런 고행을 자처했던 것은 국가의 녹을 먹은 선비로서 국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은 계층이 그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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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만도는 재산(才山·현 경북 봉화군)의 선영 묘막에서 단식을 시작했다가 친족들의 요청으로 장소를 큰집으로 옮겼다. 그를 아끼는 친지들이 함께 단식하며 뜻을 꺾고자 했으나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식하면서도 방문객을 일일이 만나 대화하며 결코 동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친구들과 인생을 논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했으며, 자신의 사후 장사 문제까지 유언했다. 어린 손자들에게는 손을 잡고 유학 원리를 강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유학자의 소임을 다했다.

당시 안동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의 단식은 제자와 친족, 그리고 이 지역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그의 사후 안동지역에서 10여명이 일제에 항거해 순국했고 특히 가까운 친척인 이동언(李東彦), 을미의병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김도현(金道鉉)은 각각 단식과 투신으로 순국의 길을 택했다.

이만도의 단식 소식이 알려지자 일제는 청구동으로 경찰을 보내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혼수 상태에 있던 이만도는 “스스로 나의 목숨을 끊는 것이 소원”이라며 “나는 조선의 정이품 관료이니 감히 누가 나를 설득하며 누가 나를 협박하려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 3일 후인 1910년 9월 8일(음력) 죽음을 맞았다.

이 일기의 배경이 됐던 청구동에는 광복 후 정인보가 그의 행적을 글로 짓고 김구가 비문의 제목을 쓴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가 세워져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심 상 훈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한국사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안동 선비 이만도는 단식으로써 조선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며 마지막까지 선비의 책임을 다하다가 순국했다. ‘청구일기’는 그의 순국과정을 주변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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