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문화 푸대접’

  • 입력 2004년 6월 25일 18시 40분


한 세미나에서 애니메이션에 종사하는 분들을 만났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곤경에 처해 있다며 다들 한숨이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고,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라고 하면 슬슬 자리를 피한다고 한다.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졸업생이 해마다 수천명씩 쏟아져 나오지만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유망 문화산업으로 꼽히는 애니메이션이 이 정도라면 다른 문화 분야의 사정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요즘 문화계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60여개 문화단체가 똘똘 뭉쳐 ‘기초예술 살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기초예술이 고사위기에 놓여 있다’고 하소연하지만 반향은 크지 않다.

▼생사기로에 선 문화계▼

돈을 얼마 더 지원해 달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문화가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과 사명감이다. 이들이 내놓은 선언문은 ‘지금은 의미 있는 예술작품이 출현했을 때 응당 있어야 할 반향과 사회적 공명의 틀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시와 음악과 아름다운 색채가 없는 회색도시가 우리의 미래일 수 없다”고 호소했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문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경제가 어려워서일까. 문화인들의 능력이 모라자서인가. 여러 원인이 있을 테지만 정부의 문화 푸대접도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하기야 역대 정권 중에도 문화에 공을 들였던 예는 별로 없다. 문화부 장관의 면모를 보면 잘 드러난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1970, 80년대는 논외로 치더라도 90년대 이후 문화부 장관은 거의 정치인이 임명됐다. 90년부터 지금까지 12명의 장관이 부임했으니 평균 1년 정도 있다가 홀연히 정치판으로 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문화를 전혀 모르는 정치인이라도 좋은 문화부 장관이 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1년 정도 자리에 있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가 문화부 장관은 정치인을 앉혀도 상관없다는 대통령의 인식이다. 통치자들이 문화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이고 이런 몰이해가 일반 사람들의 문화인식에 미치는 부작용도 결코 적지 않다. 문화인들은 당연히 문화 푸대접으로 받아들인다.

영화인 출신인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1년여 만에 바뀔 예정이다. 모처럼 문화를 아는 장관이었던 그는 “장관이 바뀌더라도 일은 시스템으로 하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 얘기는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문화 분야에는 틀린 말이다.

이 장관은 얼마 전 ‘창의 한국’ 계획을 발표했다. ‘창의 한국’은 영국의 ‘창의 영국(Creative Britain)’ 계획처럼 장기적 비전을 갖고 수립한 문화정책으로 국내 최초의 것이었다. 그러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예산부족 문제도 있었지만 그가 곧 바뀔 장관인 탓이었다. 우리처럼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나라에서 다른 부처도 아닌 문화부의 전임 장관이 세운 정책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문화정책은 누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추진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문화부 장관이야말로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할 필요가 있다.

▼문화 중흥과 통치자▼

최근 문화는 흐름을 타야 성공을 거둔다. 영화 붐은 영화 관람이 사회적 유행으로 정착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화의 세기’를 살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문화 대통령’이 요구되는 시기다. 대통령이 정말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문화현장을 직접 챙긴다면 문화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조선시대 세종이나 영조 때 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최고지도자가 문화와 학문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문화의 붐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문화인들은 돈보다 흥이나 신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문화인의 존재가치를 사회가 알아줄 때 더욱 신이 나서 창작에 몰두한다. 우리처럼 정부가 무관심한 형편에서 문화의 활성화를 바라는 것은 사막에서 꽃을 찾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다. 이대로 세월만 흐른다면 문화인들의 절규대로 문화는 죽을 수밖에 없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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