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존경을 받았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가문의 분재기(分財記·재산 분배 기록)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 문서는 이황의 손녀 사위였던 운천 김용(雲川 金涌)의 종손가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로 이황의 손자 손녀 5명이 합의해 재산을 분배한 기록인 ‘화회문기(和會文記)’다. 초안은 1586년에 만들어졌지만 전란 등의 사정으로 미뤄지다가 1611년에야 완성됐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제사를 위해 맏아들에게 일정 부분의 노비와 전답을 별도로 지급했다. 다만, 아버지 준(寯·이황의 아들)은 “너희 조부의 신주를 모셔두는 사우(祠宇)는 백세(百世)동안 옮기지 못하고 묘제(墓祭) 역시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조선 전기 자녀균분 상속의 관행에서 벗어나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변모해 가는 추세도 나타난다. 예컨대 노비의 경우 장자인 이안도(李安道)에게 제사를 위한 10명을 포함해 94명을 지급한데 비해 박려(朴%)의 처인 장녀에게는 72명, 차남 이순도(李純道)에게 60명, 김용(金涌)의 처인 차녀에게 63명, 막내 이영도(李詠道)에게 64명을 각각 배당했다.
그러면 분배된 노비 353명 가운데 이황에게서 직접 상속받은 노비는 몇 명일까.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둘째 채(寀)는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재산은 준에게 상속됐다. 따라서 이들 노비 중 준의 처가 소유했던 33명과 이황이 사망한(1570년) 이후에 태어난 16세 이하 160명을 뺀 나머지 160명이 그가 소유했던 노비로 추산된다. 여기에 그의 거주지인 예안(禮安)을 비롯해 안동·영주·봉화·의령 등지에 산재한 전답을 합치면 그의 재산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이 관직에서 은퇴한 뒤 도산서원에서 상당수의 제자를 길러 낼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는 여기서 마련된 셈이다. 이는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유수한 사림의 보편적 경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을 갖기 힘든 법이기 때문이다.
설석규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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