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는 전화 통화처럼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e메일처럼 구구절절 설명도 하기 어렵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즐겨쓰는 M(mobile)세대는 이제 상대방의 상황을 알 수 없는 문자메시지로도 상대의 나에 대한 감정을 읽어낸다.
바야흐로 목소리 대신 문자로 통하는 시대다. 출판계에서는 ‘신 문맹시대’라 탄식할 만큼 사람들이 문자를 멀리하는 요즘, 오히려 ‘움직이는 문자’는 주요 의사소통 방식으로 급부상 중이다. SK텔레콤에 따르면 올해 휴대전화의 하루 통화량은 지난해보다 7% 늘어난 반면, 문자메시지 하루 이용 건수는 26% 증가했다. 이동통신회사 3개사의 집계를 종합하면 이 땅에서는 1시간에 평균 904만건의 문자메시지가 오간다. 초당 2511건이 숨가쁘게 오가는 문자메시지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들여다보았다.
○ 나는 너에게 독백한다
회사원 신승희씨(27·여·부산 동구)는 날마다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내용은 ‘행복한 하루∼’ 같은 인사말이거나 “인터넷에서 본 좋은 말들”이 대부분. 지난해 대여섯 명의 친한 친구들에게 보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20여명으로 늘었다. 100% 답장이 오진 않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답장보다 나를 알리고 안부를 전하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문자메시지를 100개쯤 보낸다는 고교생 김지숙양(18·서울 구로구)은 주로 혼자 지하철을 탈 때 문자를 쓴다. 내용은 ‘나 지금 전철 탄다’ ‘너랑 꼭 닮은 애 봤다’ 등 휴대전화가 없었다면 잠깐 떠올리고 말았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이다. 중앙리서치가 5월 문자메시지 이용자 500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장소는 ‘대중교통수단’(34.4%)이 가장 많았다. 또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상황은 ‘혼자서 심심할 때’(40.4%)가 가장 많았다. ‘급하게 연락할 때’는 20.2%, ‘안부를 전할 때’는 13.4%였다. 심심해서 독백을 하는 상황에도 이제 ‘상대방’이 필요한 것이다.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하는 기업들처럼 마주보고 말하기 곤란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문자메시지로 통보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하루에 40∼50건의 문자를 쓰는 김재우씨(23·서울시립대 3년)는 여자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로 결별 통보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만나서 말해야 하는 내용을 문자로 보낸 뒤 전화연결도 안되고 그걸로 끝이라서 황당했다”고 한다.
위크엔드팀이 인터넷 리서치회사 아이클릭과 함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이용자 300명을 조사한 결과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거나 절교 선언 등 일방적 통고를 문자메시지로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51%였다. 이는 나이가 어릴수록 많아서 10대(52명)의 63.5%, 20대(105명)의 63.8%, 30대(93명)의 35.5%, 40대(50명)의 40%가 그런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 마이크로 코디네이터들
휴대전화 문자족들은 약속에 늦으면 지금 어디쯤 간다고 끊임없이 문자를 날린다. 만약 계속 전화를 하면 이상하겠지만 그걸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편안한 문자로 대체하며 관계의 사소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관리하는 ‘마이크로 코디네이션 (Micro Coordination)’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가영화사 대표 이희주씨(35ㆍ여)는 자신에게 문자메시지는 “직접 통화로 가기 위한 안전장치”라고 설명한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만한 상황인지 불투명할 때 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 서로 통화하기 편한 시간 약속을 잡는다. 모임에 늦을 때도 “이모티콘을 섞어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나중에 상대방이 ‘어디쯤 왔느냐?’고 전화로 물어도 문자로 이미 한번 걸러졌으니 덜 미안하고, 한숨 고르고 이야기하기가 편하다”고 한다.
베네치아건설 부사장 안현진씨(35)는 돈 문제처럼 직접 하기 곤란한 말을 꺼낼 때 사전 정지작업 용으로 문자메시지를 주로 쓴다. “빚을 갚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색하지 않고, 받는 입장에서도 ‘말하기 곤란해서 문자를 보냈구나’하고 이해해주니까 그 다음 과정이 껄끄럽지 않다”는 것.
상대의 즉흥적인 애드리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게 해주는 문자메시지는 관계 맺기의 안전한 방식이기도 하다. 김재우씨는 “말로 하기 쑥스러운 사랑고백을 문자로 하는 친구들도 있다”면서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보내는 사람은 그걸 더 편하게들 여긴다”고 했다.
사랑고백까지 문자메시지로…. 너무 가벼운가? 그러나 문자족들은 문자메시지의 가벼움 대신 지속적인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킹의 긍정적 측면을 주목한다. 문자메시지를 쓰지 않는다고 더 심화된 의사소통을 할 것 같지는 않고 되레 친구들끼리 부담 없이 자주 연락하게 되고 서로의 일상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 회사원 정은경씨(27ㆍ여ㆍ서울 강남구 논현동)는 “용건 없이 전화하면 싱거운 것 같고 왜 전화했는지 말하자니 쑥스러운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로 자주 안부를 묻는 편”이라고 한다. 직장에서도 한 프로젝트를 끝낸 뒤 상사로부터 “잘했어요”같은 격려를 문자메시지로 받는다. 이는 듣고 난 뒤 표정관리가 쑥스러운 말보다 더 친근한 매체다.
○ 인스턴트 기브 & 테이크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때 답장이 오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속어는 ‘씹혔다’이다. 문자족들은 답장이 얼마동안 오지 않아야 ‘씹혔다’고 생각하게 될까? 1시간 가량을 예상하고 물었는데 답변은 “1∼2분”(김지숙ㆍ고교생), “5분”(김재우ㆍ대학생), “20분”(안현진ㆍ직장인)이라고 돌아왔다.
문자메시지를 통한 의사소통에서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시간은 인스턴트 메신저만큼이나 짧다. 문자메시지를 쓰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LG텔레콤이 문자메시지 이용자 207명을 조사하면서 하루에 문자메시지를 1∼2건 밖에 쓰지 않는 20대 초반 대학생 남녀에게 왜 문자메시지를 이용하지 않는지를 묻자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싫다’ ‘수신 확인이 안된다’가 주요 이유였다. 즉각적 반응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 자체를 기피하는 것.
1분에 300타 가량의 초고속 손놀림으로 문자메시지를 치는 김재우씨는 “일단 손에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중요한 연락을 놓칠까봐서가 아니라 인스턴트 메신저처럼 문자메시지로 즉시 물어보고 답변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이다. 그는 “대개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보다 문자 메시지가 ‘씹히는 것’을 더 불쾌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봐 심리적으로 더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는 ‘문자의 달인’이지만 정작 문자메시지를 컴퓨터에 보관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려고 시도해본 적은 없다. “아직까지 오래 보관해둘만한 내용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고받고 나면 ‘문자’는 ‘말’만큼 빠른 속도로 잊혀진다. 문자의 기록성 대신 즉흥성이 두드러지게 된 것도 문자로 통하는 시대의 아이러니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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