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매달 첫째 월요일 정기모임을 가지며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5일 저녁 서울 강남의 JW 메리어트호텔 연회실에서 열린 ‘원탁회의’ 현장을 들여다봤다.》
○ 푸드 스타일 인큐베이터
LTB는 주방장들의 모임답게 우선 시식행사로 시작된다. 모임 장소를 제공한 호텔의 주방장들이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이 관례. 메리어트호텔 주방팀은 국내에선 쉽사리 구하기 힘든 알래스카 자연산 연어와 냉해에서 자란 해산물들을 재료로 한 음식들을 선보였다.
뷔페식으로 선보인 요리 중 최고 인기 메뉴는 ‘킹크랩 치즈 퐁듀’와 ‘미소(일본된장)소스를 얹은 연어 꼬치구이’. 원래 킹크랩은 삶은 그대로를, 연어구이는 발사믹 소스로 조리하는 것이 정석.
연어구이에 미소소스를 얹을 것을 제안했던 메리어트호텔 이상정 부총주방장에게 같은 호텔 에드 먼터 총주방장이 격려의 말을 건넨다.
“동양적 접근이 새로운 미각을 살려냈군요.”
“총주방님이 제안한 대게 요리가 더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콤한 향신료를 넣은 치즈 퐁듀에 대게를 찍어 먹을 생각을 누가 했겠습니까.”
40여명의 참석자들은 선 채로 음식을 먹으며 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얘기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새로운 재료나 음식 트렌드 등 식음료시장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간다.
이날 화제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따를 것인지, 한국인 입맛에 맞춘 변형된 음식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 요리사들이라면 누구나 오랫동안 생각해옴직한 주제다.
이 부총주방장은 “유럽음식을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드는 작업이나, 재료 맛을 중시하는 서양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양념 맛이 강한 우리 음식을 변형시키는 작업을 수없이 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각자 주방에서 고심한 아이디어나 절충안을 이런 공개 장소를 통해 검증 받는다.
○ 모자를 벗은 총주방장들
위계질서가 확실한 조리업계에서 특급호텔 총주방장과 보통 주방장들이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곳에서만큼은 격의 없는 편안한 대화가 이어진다.
한국 LTB 대표인 허버트 클링크함머 서울클럽 총주방장은 “웬만하면 흰색 조리사 복도 입고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원래 LTB는 주방장을 상징하는 ‘흰색의 높은 모자’란 뜻의 프랑스어. 모자가 높을수록 지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모인 총주방장들의 모자는 50cm 정도. 조리할 때 빼놓고는 모자와 함께 권위도 벗어버린다.
1975년 프랑스 식품공급업체 루지사가 원활한 식품 공급의 창구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한 조직이었지만 지금은 국가 또는 지역 단위별로 자체 운영되는 비영리단체. 전 세계 2500명의 회원이 있다.
전현직 호텔 총주방장이 주요 회원. 또 이들이 추천한 조리사 중 회원들의 인준을 받으면 정회원이 될 수 있다. 식품업체나 대사관 식품담당 직원 등은 준회원으로 활동한다. 현재 국내 정회원은 44명, 준회원 30명.
1981년 한국 LTB의 창립멤버인 콘라드 베르머스 당시 쉐라톤 워커힐호텔 조리장(현재 메모리스 레스토랑 주방장)도 “그때만 해도 몇 안 되던 외국인 호텔 주방장들이 한국인 주방장과 친목을 도모하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이곳에서는 또 새로 부임한 호텔 주방장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가족동반 단체 야유회를 함께 다니기도 한다. 한국 호텔 총주방장들의 모임인 ‘한국총주방장협회(KCC)’와도 자주 교류한다.
○ 후진양성 위한 정보수집
총주방장들은 모임에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준회원으로 모임에 참석한 식품공급업체 관계자들이 각종 정보를 제공한다.
이들은 해외 음식 트렌드와 재료 가격 등의 식품시장 근황을 알려오거나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공급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와 재료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거나 해외 요리대회에 나갈 때 소중한 자료가 된다.
주방장들은 치열한 라이벌 관계이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자신의 ‘비법’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해 LTB 대표였던 한스 보그트(웨스틴조선호텔) 총주방장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가운데 음식이 한 단계 발전해 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조리법은 교환해도 새로운 아이디어만큼은 후배들을 위해 아껴둔다. 국내외 대회에서는 각 호텔 총주방장들이 자존심을 걸고 후배를 지도해 내보낸다.
28, 29일 열리는 호주축산공사 주최 ‘블랙박스 대회’에는 33세 미만의 젊은 호텔조리사들이 출전한다. 이 대회 심사위원은 각 호텔의 총주방장들. 자신이 지도한 후배들의 순위가 결정되는 긴장된 순간이다.
물론 승패보다는 해외무대에서 인정받는 후배들을 얼마나 양성해 내느냐가 이들의 최대 관심사. 경쟁과 공생관계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요리에 끝없이 도전하는 그들은 ‘궁극의 미각’을 개발해 내는 ‘맛의 거장’임에 틀림없다.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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