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영웅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아래 이순신을 넬슨보다 높이 평가했던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연재소설 ‘리순신젼’(1908년)을 통해 “대저 수군에 으뜸가는 위인이 있고 철갑선 창조의 비조인 우리나라”의 위엄을 들어 반외세 국권회복 의지를 주창했다.
‘소설 이순신’(1931)을 쓴 이광수는 “나는 이순신을 철갑선의 발명자로 숭앙하는 것도 아니요, 임란의 전공자(戰功者)로 숭앙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춘원이 진실로 숭앙한 것은 이순신의 ‘자기희생적, 초훼예적(超毁譽的), 그리고 끊임없는 충의’였다. 이광수는 그런 이순신을 보여주기 위해 “상상으로 창조하려는 생각 없이” 옛 기록 그대로를 그려냈다. 절개와 충의에 초점을 맞추되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한 점은 뛰어나나 당대의 비극적인 현실은 고려하지 않았다.
홍성원의 5부작 ‘달과 칼’(1993)은 유능한 지장(智將)으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인격체로서의 이순신을 그려냈다. 객관적 입장이나 영웅적 행동보다 그의 개인적·실존적 고뇌가 무엇이었는지에 관심을 두었고, 무엇보다 “칠년 왜란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재앙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난을 일으킨 것은 왜(倭)이지만 그 난을 조선에 부른 것은 개문납적(開門納賊), 바로 조선 백성 자신들”로 보았다. 이순신은 개인이 아닌 당대인 전체가 겪어야 했던 임진왜란, 바로 그 속에서 백성과 함께 고통당하고, 그들과 함께 그 고통을 벗어나려 한 운명공동체적 존재로 그려졌다.
한편 이순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조시킨 ‘칼의 노래’(2001)에서 김훈은 이순신과 작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두 존재의 변증법적 결합을 시도했다. 냉정하고도 담백한 문체로 그려지는 작품의 이런 특징은 정유년 전쟁 어느 날을 그린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소강상태에 처한 전쟁을 “천천히 죽어가는 말기 암”으로 보고 그것이 “적이 죽어가는 것인지 내가 죽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판단하는 존재는 이순신이지만, 바로 잇달아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존재는 분명 작가 자신이었다. 엄밀히 말해 ‘칼의 노래’는 역사적 존재인 이순신이 아닌 현실적 존재인 작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해 지난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최근 출간된 김탁환의 8부작 ‘불멸의 이순신’은 구성의 치밀함과 방대한 자료 소화력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이순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 전장은 물론이고 조정 대신뿐 아니라 선조 임금과의 관계까지 파헤친다. 특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원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 드러난 역사보다 감추어져 있되 있을 법한 역사의 이면을 들춰낸다. 23전 23승이란 개가를 올린 명장 이순신의 신화 뒷면을 총체적으로 파고든다.
현대에 가까워 올수록 작가들은 역사적 사실과 분명한 거리를 두며 이순신을 창조해낸다. 이순신은 더 이상 우상이나 신으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살’과 ‘피’가 감도는 존재로 등장한다. 가령 “몸도 아프고 기운도 예전 같지 않아 갑옷과 투구가 무거울 지경”(‘불멸의 이순신’)이라고 하소연하는 이순신은 ‘리순신젼’이나 ‘소설 이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다.
해를 거듭해 끊임없이 창작되고 재해석되는 ‘문학적’ 이순신이 있기에 이순신은 우리와 함께 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최영호 해군사관학교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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