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한국에서 와인 수십 병을 한꺼번에 장기 보관할 수 있는 와인셀러가 잘 팔린다는 사실. 그는 “프랑스에선 와인을 집에 쌓아두고 마시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애호가이거나, 부호이거나, 와인 생산자”라고 말했다. 일반 가정에는 와인 서너 개를 놓을 수 있는 와인 랙을 두는 게 보통이다.
한국의 웬만한 애호가들은 프랑스 부르고뉴와 보르도 레드 와인용 잔을 따로 갖춰 놓고 있다고 하자 “프랑스에선 와인잔 판매업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일반 식당에서 식사 내내 손으로 잔을 돌리거나 입에 공기를 넣어 ‘후루룩’ 소리를 내는 사실에 대해서도 꽤나 낯설어 했는데 프랑스에선 와이너리 방문객들이 시음을 하면서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1000년 이상의 와인 역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 이제 막 와인 소비가 시작된 한국은 와인 문화에 관한 한 프랑스인의 눈에 엄청난 ‘선진국’이었다.
○ 오로지 레드, 오로지 칠레
한국 와인 시장은 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은 후 잠시 주춤했을 뿐 매년 수십%씩 급성장했다. 와인 수입업체도 87년 민간업자의 주류 수입이 허가될 당시 7개이던 것이 지난해 말 현재 와인 수입 면허를 갖고 있는 업체가 350여개, 실제로 수입을 하는 업체도 80여개로 늘었다.
90년대 초반 미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프랑스인의 동물성 지방 섭취가 미국인보다 2배나 많은데도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3분의 1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일컫는 말이다. 96년 한국에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자 이듬해 ‘제1차 레드 와인 붐’이 일었다. ‘몸에 좋다’는 말이 레드 와인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비중은 9 대 1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의 경우 6 대 4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레드 와인에 대한 선호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소믈리에 출신인 호주대사관 김명진 상무관은 “한국 사람들은 요리와 상관없이 레드 와인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며 “와인은 음식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 한국에서만 예외적으로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워낙 화이트 와인이 안 팔리자 수입상들이 아예 수입을 꺼려 시장이 축소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칠레 와인의 약진도 비슷하다. 세계 시장에서 10위권인 칠레는 한국 시장에서 프랑스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신라호텔 라 컨티넨탈의 소믈리에 김학수씨는 “최근 손님들이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는 말을 들었다며 칠레산만 찾는다”고 말했다.
사실 찾아보면 칠레 와인보다 가격이 더 싸고 품질이 좋은 와인도 있을 수 있다. 서호주와인협회 마이클 힐 고문은 “가격만 놓고 보더라도 호주 와인이 지속적인 기술 혁신으로 원가를 낮춰 왔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칠레 와인보다 평균 가격이 더 싸다”고 지적했다.
와인21닷컴 최성순 대표는 “와인은 오랜 역사 속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찾아내는 게 재미인데 칠레 와인은 역사가 짧은 편”이라며 “수입업체들이 칠레 와인을 앞 다퉈 수입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중저가 와인이 들어오면 올해 칠레 와인의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와인나라 이철형 대표는 이 같은 한국 와인의 특성을 놓고 한마디로 ‘동네 축구 스타일’이라고 규정했다. 어디서 한 번 뭐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다른 쪽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지극히 한국적인 에피소드들
프랑스의 그랑 크뤼급 와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브랜드는 샤토 탈보다. 수많은 고급 와인 가운데 유독 이 와인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뭘까.
대유와인 이경희 마케팅 실장은 “높은 분들이 이름을 외우기 쉬워서”라고 말했다. ‘땅딸보’를 연상시켜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안 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프랑스산 샤토 노통이 반짝 인기몰이를 한 것도 비슷하다.
쉬운 이름의 고급 와인이 인기를 끄는 배경은 의외로 단순하다. 와인 인구가 늘었어도 여전히 개인이 직접 사서 마시는 수요보다 선물용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이 이름을 듣고 알만한 와인을 보내야 실패할 확률이 적다.
와인은 계절에 따른 수요 변화가 크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무렵에 많이 팔리는데 와인 숍 직원들은 명절 전보다 끝난 후에 더 바쁘다. 선물로 들어온 와인의 철자를 하나하나 불러주고 가격을 묻는 문의전화가 빗발치기 때문이다. 와인의 종류나 특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가격이 문제다.
한국에선 와인 소비가 다양한 장소에서 이뤄진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와인숍을 운영하는 A씨는 “낯선 손님이 와서 몇 박스씩 와인을 구입해 갈 때는 주변 룸살롱이나 요정이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말했다. 룸살롱에서 와인은 브랜디와 섞여 ‘드라큘라주’가 되거나 화이트 와인을 잔에 볼록하게 올라올 정도로 꽉 채워 단숨에 마시는 ‘매미눈깔주’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서울 교외의 러브호텔에서 서비스로 와인을 제공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한다. 피로회복제나 생수를 갖다놓던 러브호텔이 고급스럽게 차별화하겠다며 와인을 준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들으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지만 서울 시내 유명 보신탕집들의 메뉴판에도 와인이 포함된 지 오래다.
○ “당신의 품격을 위하여”
두산 주류 BG의 신승준 상무는 몇 해 전 동유럽 출장을 잊지 못한다. 해질 무렵 마을 사람들이 주전자를 들고 와이너리를 찾아가 몇 유로씩 내고 호스로 와인을 받아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신 상무는 “어렸을 때 막걸리를 받으러가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유럽 사람들에게 와인은 생활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한국은 어떤가. 와인평론가 김혁씨가 얼마 전 와인 강의를 위해 서울 강남의 한 유명 와인 바를 찾았을 때였다. 유명 연예인을 포함해 남녀 몇 쌍이 모여 김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테이블에는 한 눈에 봐도 상당히 비싼 와인이 몇 병 놓여 있었다. 수업 내내 강의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김씨는 고급 와인이라는 것을 검증 받기 위해 자신을 불렀나 싶어 기분이 찜찜했다고 한다.
소믈리에 김학수씨는 “호텔 식당에 두 명이 와서 식사를 하며 50만원이 넘는 와인을 시켜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 정도 가격이면 프랑스에선 일생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하는 술이다.
전반적인 와인 가격도 비싸게 형성돼 있다. 프랑스나 독일에선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1만원 정도 되는 와인이 나와도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여기는데 한국에서 이 정도 와인은 할인점에서나 팔린다.
‘술의 사회학’을 펴낸 부산대 박재환 교수(사회학)는 “와인은 술이 아니라 이미지에 가깝다”며 “삶이 각박하고 힘들수록 탈(脫) 일상화를 꿈꾸는 사람이 많은데 지금 한국에서 와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상이 꼭 그렇다”고 지적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1만 달러가 넘으면서 와인이 급속도로 보급된다는 게 정설이다. 한국의 와인 문화에 일부 거품이 있고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이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폭음 문화를 바꿔놓을 대안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와인 붐이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모델=아리랑TV 홍보팀 최정희씨,홍익대 박상우씨, 촬영협조=아영주산)
글=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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