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왕 유방은 소하의 말을 따라 다음날로 남정(南鄭) 교외의 한군(漢軍) 진채 안에 흙으로 높고 넓게 제단을 쌓게 했다. 여러 장졸이 그 제단을 쌓는 까닭을 궁금히 여기자 소하가 넌지시 알려주었다.
“대왕께서는 격식을 갖춰 대장군을 세우려 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를 대장군으로 세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자 장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세운 공이 가장 크다 여겨 스스로 대장군이 되리라고 믿으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자(日者·군중에서 천문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사람=視日)가 고르고 고른 날이 오자 많은 장졸을 그 아래 불러 모은 한왕은 정하게 재계(齋戒)하고 제단에 올랐다. 그 뒤를 대장군의 인뒤웅이와 부월(斧鉞)을 받쳐 든 연오(連敖)들이 따랐다. 이어 홀기(笏記)를 부르는 예관(禮官)이 소리쳤다.
“치속도위(治粟都尉) 한신은 단장(壇場) 위로 올라와 대장군의 인수(印綬)와 부월을 받으라!”
그 뜻밖의 외침에 제단 아래 몰려 있던 장졸들은 모두가 놀라 마지않았다. 특히 자신이 바로 그 대장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 은근히 그날을 기다려온 장수들은 놀라움을 넘어 묘한 허탈감까지 느꼈다. 큰칼을 차고 언제나 한왕 곁에서 그를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싸움마다 가장 앞장서 적을 무찌른 번쾌, 기장(騎將)으로 날랜 말을 몰며 매서운 기세로 적진을 누벼온 관영, 옥리(獄吏)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그 몇 년 싸움터를 헤쳐 오면서 누구 못지않은 맹장으로 자리 잡은 조참, 강한 활을 쏘며 가장 앞서 성벽에 뛰어올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주발, 전차(戰車)로 적진을 가르고 치열하게 싸워 등공(등公)에 이른 하후영 같은 장수들이 그랬다.
그런 장수들의 마음을 헤아렸던지 한왕이 인수와 부월을 한신에게 내리기 전에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엄숙하게 소리쳤다.
“여기 이 인수와 부월은 곧 이 몸을 갈음한다. 누구든 이 인수와 부월을 받든 이에 거역하는 것은 곧 나를 거역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한왕은 배례(拜禮)가 끝나자마자 한신을 윗자리에 큰 스승 모시듯 앉히고 물었다.
“전부터 승상이 여러 번 장군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소만 과인이 오만하고 무례하여 장군을 알아보지 못하였소. 이제 장군을 대장군으로 세우는 의례를 끝냈으니 장군은 어떤 계책으로 과인을 가르치시겠소?”
그런 게 바로 한왕 유방이었다. 매사에 느긋하고 유들거리지만 결단이 필요한 때를 당하면 칼로 베듯 명쾌했으며, 어지간한 사람은 눈앞에 없는 듯 얕보아도 한 번 믿음을 주면 모든 걸 통째 맡겼다.
달라진 것이 놀랍기는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군례(軍禮)로 한왕의 믿음에 답하는데, 그 의젓함이 벌써 장졸들이 전부터 알고 있던 한신은 아니었다. 초나라를 버리고 왔는데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한나라에 불평만 가득한 연오랑도, 용케 목숨을 건진 주제에 허구한 날 하후영이나 소하를 잡고 허풍만 쳐대던 그 치속도위도 보이지 않는 대신, 어디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는 헌칠한 대장군이 거기 서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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