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11>도성팔도지도

  • 입력 2004년 7월 19일 18시 26분


경북 안동 하회마을 북촌 댁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 중에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가 있다.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는 작성자를 알 순 없지만,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1542∼1607) 선생의 후손으로 1820년대에 우승지 호조참판 등을 지낸 유이좌(柳台佐)가 소장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도는 대개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되지만 그 안에 성곽, 도로, 봉화, 교량, 저수지, 산성, 사찰, 서원 등 사회경제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이 수록돼 동시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9장으로 된 이 필사본 지도는 청색, 적색, 노란색, 연두색, 검은색 등 여러 색으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도성도(都城圖)와 팔도지도가 합쳐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도성도는 성곽 내부에 궁궐과 관청 등 주요 시설물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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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뒷면에는 도성 둘레와 인구수, 전답의 면적, 세금 납부액, 15세 이상의 양인과 공사천민(公私賤民)들로 편성된 지방군인 속오군(束伍軍)의 숫자, 전투용 배였던 전선(戰船)과 거북선의 숫자가 기록돼 있다. 한성부 도성의 둘레는 1만 4573보(步)라고 돼 있으니 약 11km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남자 9만4074명, 여자 11만3173명이고 조선의 전체 인구는 759만 1275명(함경북도 제외)으로 집계돼 있다.

전선은 111척, 거북선은 5척, 속오군은 21만 3575명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당시 거북선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설계도가 전승되지 않아 개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대포를 쏘는 구멍의 배치와 높이, 간격, 노 젓는 사람의 위치 등이 맞지 않기 때문에 보통 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거북선은 조선말기까지 각 수군 병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도를 그린 사람은 “우리나라 지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모두 종이의 크기에 따라 가로 세로의 크기가 맞지 않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위치가 바뀌어 지도를 살펴보아도 근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장님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며 “나는 이런 단점을 보완해 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해 이 지도의 정밀함을 과시하고 있다.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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