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방한한 미국의 유명 그래피티 아티스트 시즈(29)와 리보크(27)의 서울에 대한 첫 인상은 그랬다. 그래피티란 건물 외벽 등에 형형색색의 이미지를 그리는 미술작업의 일종. 이들은 고급 청바지 브랜드 디젤의 뉴욕 매장을 그래피티로 꾸민 것을 비롯, 미국 일본 등에서 그래피티 전시회를 갖는 국제적인 스타들이다.》
“공사장 외벽은 활용하기 나름입니다. 그대로 두면 무감각한 ‘회색도시’의 거추장스러운 구조물에 불과하겠지만 그곳에 감각적인 색과 디자인을 입히면 훨씬 생동감 있는 예술품이 되어 도시민들의 감성을 채워줄 것입니다.”
이들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올해로 두 번째를 맞는 ‘언더 뉴욕 프로젝트’(www.underny.org)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 행사는 재미 건축가 유병안씨(31)가 뉴욕의 문화를 서울에 알리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지난해에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공연을 했다. 올해는 뉴욕의 상징인 그래피티 아트를 서울에 옮겨보겠다는 것.
방한기간인 22일부터 이달 말까지 쉐라톤워커힐호텔 야외수영장 외벽을 꾸미는 작업과 24일 시청 앞 서울광장 등에서 그래피티 작업을 시연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래피티는 예술이다
20일 사전작업을 하기 위해 호텔 수영장을 찾은 이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묻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백하듯 천천히 말문을 연다.
“Graffiti is an ART, man(그래피티는 예술이다).”
예술은 찰나의 영감으로 떠오르는 감성을 표현하는 작업이라는 것. 작품 영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질문도 말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9일간 작업할 높이 2m, 길이 30여m의 수영장 외벽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들의 몸에는 직접 디자인한 이미지로 온통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전형적인 히피 분위기와는 달리 작업에 임하는 자세는 너무나 진지했다.
한국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그들 자신도 무슨 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된다며 시험삼아 손에 든 스프레이 페인트를 공중에 ‘칙∼ 칙∼’ 뿜어댔다.
이들은 스스로를 작가(writer)라 부르며 본명 대신 필명(태그)을 쓰기를 고집한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스프레이 페인트도 모두 뉴욕에서 직접 공수해 왔다. 500여 가지가 넘는 색상의 페인트와 갈아 끼우기만 하면 분무량이 조절되는 다양한 크기의 노즐도 준비했다. 대형벽화 작업을 위해 공기압축기(에어 컴프레서)와 호스도 갖춰 놨다.
●영역을 확장하는 그래피티
그래피티는 원래 ‘벽에 긁어서 그린 그림’이란 뜻으로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벽화 등을 가리키던 말.
현재의 의미는 1960년대 뉴욕의 갱스터(폭력집단)들이 영역 표시를 위해 자신의 태그를 벽에 적어 놓은 데서 유래했다. 여기에 브루클린, 브롱크스 등 낙후지역 소외계층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보밍(bombing·벽이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 그림을 그리고 도망가는 행위)’으로 표현하던 것이 1990년대 힙합문화와 뒤섞이면서 더욱 화려하고 다양해졌다.
처음에 단색위주였던 태그는 버블(풍선모양), 2D(음영이 들어간 글씨), 3D(입체감이 표현된 글씨), 올드 스쿨(딱딱한 글씨체), 와일드 스타일(복잡한 문양이 들어간 글씨체) 등으로 디자인 성격이 분명해졌다. 입체적인 표현법이 발달하면서 사진처럼 그린 인물화와 만화주인공 같은 캐릭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다양해졌다. 근래에는 미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게 됐다.
국내에서는 1994년경부터 인터넷 외국 사이트를 통해 조금씩 알려지다가 역시 힙합문화와 함께 자연스레 퍼져 왔다. 1998년엔 가수 구준엽이 컴필레이션 앨범 ‘클럽 DJ’시리즈의 재킷을 그래피티로 처음 디자인한 것을 비롯해 많은 댄스그룹 등이 그래피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압구리 명예의 전당’
199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그래피티 사이트를 열었던 반달(본명 홍희남·31), 코마(박준기·31) 등은 이 분야의 공인 1세대. 반달은 몇 년 전 한국에서 열린 ‘월드힙합 페스티벌’에서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들과 함께 작업한 대형작품을 행사가 끝나자마자 주최측이 부숴버렸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외국 작가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죠. 외국에서는 행사 후 경매를 통해 판매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무대 소품이나 낙서쯤으로 생각하는 거죠. 문화 수준도, 시장도 아직은 그 정도인가 봐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그래피티 전문 작가는 100여개 팀. 그중 20여개 팀이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이들은 업소나 무대, 뮤직비디오의 배경 등을 작업한다. 보수는 1m²당 3만∼7만원 수준. 수백만원씩 받는 외국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사회적 인식이다.
지난해 말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명예의 전당’으로 불리는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의 준말)’에서는 지역 주민의 민원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30여m의 지하보도 양쪽 벽은 국내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실력을 겨루고 최고의 작품을 남겨두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불량스러워 보이는 젊은이들의 모임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금은 경찰이 통제하고 있다.
그래피티는 본고장인 뉴욕에서도 건물주와 상의해야만 벽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리보크는 “무조건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기보다는 도시미관을 살리면서 개성 있는 아티스트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리보크와 니노는 이날 쉐라톤워커힐호텔 야외수영장 벽면 한쪽에 그들의 태그를 그리느라 온몸이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됐다. 그들이 한국에서 받은 ‘영감’은 이달 말까지 수영장 벽면에 그려지는 커다란 그래피티로 조금씩 구체화될 예정이다.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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