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미쳐야 미친다” 개인박물관 만드는 수집가들

  • 입력 2004년 7월 22일 16시 29분


경기 용인시의 등잔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전깃불이 전국에 보급되기 전까지 이 땅에서 쓰였던 200여개의 등잔이 있다. 사기, 놋쇠, 철, 유기, 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등잔과 놋쇠, 철, 동, 나무로 만든 솟대가 어우러진 모습이 그만이다.

박물관의 관장은 김동휘옹(87). 그는 40여년간 등잔을 모았다. 언젠가 박물관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그에게 ‘어느 등잔이 가장 좋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옹은 조용히 그 관람객을 박물관 밖으로 나오게 한 뒤 말했다.

“손님. 제가 만약 그 안에서 어느 것 하나를 딱 집어 말하면 다른 등잔들이 얼마나 마음 상하겠습니까. 딸 같고 손자 같은 등잔들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다. 김옹은 등잔에 ‘미친(狂)’ 사람이다. 등잔에 미쳤기에 그런 경지에 ‘미칠(及)’ 수 있었다.

한 가지 사물에 마음을 뺏겨 결국은 하나라도 빠짐없이 모으려고 애쓴, 그래서 그 사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을 이룬 사람들이다.

○ 마음을 빼앗기다

김옹은 경기 수원시 토박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해 1981년까지 진료를 했다. 의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골동품을 수집하다 어느 순간 등잔에 온 마음이 쏠리는 경험을 했다. 40대 중반일 때였다.

다섯 살쯤인가, 초저녁에 잠들어 문득 깨보면 어머니가 등잔불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파르르 떨리는 심지의 불빛에 보이던 어머니의 옆모습 실루엣은 얼마나 고우셨는지.

“늙어서 철난다고 그때 ‘엄마 고단하신데 주무셔야죠’하는 말을 한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등잔을 보니까 어머니 생각이 더 납디다.”

그렇게 등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가서 골동품 상점을 두루 돌면서 등잔만 찾아댔다. 1년 정도 지나자 인사동 골동품상들은 김옹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원 등잔박사 오셨군”하고 빈정대며 차 한 잔 권하지 않았다. 등잔은 다른 골동품에 비하면 값싼 물건이라 장사에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등잔은 참 고마운 물건이었습니다. 기름을 붓고 심지에 불을 댕기면 그 조그만 불이 깜깜한 사방을 환하게 비춰주죠. 고관대작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등잔을 썼습니다. 또 참 아름답습니다. 아주 귀한 공예품입니다.”

우리나라에 한 권씩밖에 없는 만화책 2000여 작품을 포함해 모두 1만여권의 옛 만화책을 모은 김응수씨(48·골동품상)는 순전히 만화가 좋아서 모으는 것이다.

10여년 전 어느 가게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의사 까불이’를 우연히 발견했다.

“마냥 반가웠어요. 고생을 많이 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기쁨과 희망을 줬던 게 만화였으니까요. 그래서 딴 생각 없이 바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김씨는 하나에 2, 3원 하던 빈병을 팔아 몰래 만화를 보던 때를 기억한다. 만화 보기 말고 다른 놀이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러다 보니 쓸모없는 종잇장 모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다. 경기 용인시의 등잔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전깃불이 전국에 보급되기 전까지 이 땅에서 쓰였던 200여개의 등잔이 있다. 사기, 놋쇠, 철, 유기, 자기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등잔과 놋쇠, 철, 동, 나무로 만든 솟대가 어우러진 모습이 그만이다.

박물관의 관장은 김동휘옹(87). 그는 40여년간 등잔을 모았다. 언젠가 박물관 전시장에서 한 관람객이 그에게 ‘어느 등잔이 가장 좋은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옹은 조용히 그 관람객을 박물관 밖으로 나오게 한 뒤 말했다.

“손님. 제가 만약 그 안에서 어느 것 하나를 딱 집어 말하면 다른 등잔들이 얼마나 마음 상하겠습니까. 딸 같고 손자 같은 등잔들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다. 김옹은 등잔에 ‘미친(狂)’ 사람이다. 등잔에 미쳤기에 그런 경지에 ‘미칠(及)’ 수 있었다.

한 가지 사물에 마음을 뺏겨 결국은 하나라도 빠짐없이 모으려고 애쓴, 그래서 그 사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을 이룬 사람들이다.

○ 마음을 빼앗기다

김옹은 경기 수원시 토박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병원을 개업해 1981년까지 진료를 했다. 의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골동품을 수집하다 어느 순간 등잔에 온 마음이 쏠리는 경험을 했다. 40대 중반일 때였다.

다섯 살쯤인가, 초저녁에 잠들어 문득 깨보면 어머니가 등잔불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파르르 떨리는 심지의 불빛에 보이던 어머니의 옆모습 실루엣은 얼마나 고우셨는지.

“늙어서 철난다고 그때 ‘엄마 고단하신데 주무셔야죠’하는 말을 한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등잔을 보니까 어머니 생각이 더 납디다.”

그렇게 등잔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가서 골동품 상점을 두루 돌면서 등잔만 찾아댔다. 1년 정도 지나자 인사동 골동품상들은 김옹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원 등잔박사 오셨군”하고 빈정대며 차 한 잔 권하지 않았다. 등잔은 다른 골동품에 비하면 값싼 물건이라 장사에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등잔은 참 고마운 물건이었습니다. 기름을 붓고 심지에 불을 댕기면 그 조그만 불이 깜깜한 사방을 환하게 비춰주죠. 고관대작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등잔을 썼습니다. 또 참 아름답습니다. 아주 귀한 공예품입니다.”

우리나라에 한 권씩밖에 없는 만화책 2000여 작품을 포함해 모두 1만여권의 옛 만화책을 모은 김응수씨(48·골동품상)는 순전히 만화가 좋아서 모으는 것이다.

10여년 전 어느 가게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의사 까불이’를 우연히 발견했다.

“마냥 반가웠어요. 고생을 많이 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기쁨과 희망을 줬던 게 만화였으니까요. 그래서 딴 생각 없이 바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김씨는 하나에 2, 3원 하던 빈병을 팔아 몰래 만화를 보던 때를 기억한다. 만화 보기 말고 다른 놀이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러다 보니 쓸모없는 종잇장 모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다.

10년 동안 40여개국의 로봇(완구) 3500여점을 모은 백성현 교수(54·명지전문대)에게 수집은 단순히 사 모으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인 활동이다. 앞으로 어떤 수집품이 가치가 있을 것인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봇은 미래의 첨단 문명을 완성하는 오브제입니다. 또한 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기도 하지요. 이 시대의 최상의 디자인 기술이 들어가 있습니다. 로봇은 나에게 아이디어와 새로운 꿈을 주지요.”

불원천리(不遠千里)라는 말처럼 이들 수집가를 잘 묘사하는 말은 없다. 자신이 애타게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미 마음은 그곳에 가있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었을 때의 희열이란….

김응수씨는 만화를 모으기 위해 주로 헌책방을 뒤지거나 작가 또는 그 작가의 제자를 직접 찾아다녔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인식이 워낙 좋지 않았던 시절이라 작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소장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한 번은 제가 찾던 책이 지방 어디엔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내려갔습니다. 밤에 도착해서 일단 여관방에 짐을 풀었는데 도대체 잠이 오지 않는 겁니다. 어떤 만화일까 궁금해서 못 참는 거죠.”

김동휘옹은 과거 병원을 할 때 1년에 몇 번씩 수원의 동료 의사들과 지방 여행을 다녔다. 동료들은 도착하자마자 술판을 벌이고 지역 특산물을 먹기에 바빴지만 김옹은 그 자리에 참석한 경우가 없었다. 그는 택시를 한 대 빌려서 그 지역의 고물상 순회를 했다. 골동품 가게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등잔을 찾기 위해서였다.

“찾던 등잔을 사 가지고 여관으로 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이미 동료들은 음식을 거나하게 먹고 겨우 찌꺼기 정도 남겨 놓았는데 그것조차 꿀맛일 정도였으니까요.”

백성현 교수는 로봇을 수집할 때도 전략을 가지고 임한다.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에서 중급 정도의 로봇을 모으고, 중요한 것은 해외의 수집가 클럽을 통한다. 그는 최대한 자신이 로봇을 수집한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컬렉션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시장에서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수집품이 수집가를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의 기쁨은 더욱 크다.

23년 동안 쇠나 돌, 나무로 된 도깨비상 3000여점을 모은 김재연씨(56·여·무속인)가 바로 그렇다. 그는 꿈에서 자신이 사야 할 물건이 보인다고 했다.

“꿈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는 집의 위치가 기억에 생생한데,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일이 많이 생겼죠. 골동품 가게를 지날 때 이상한 느낌에 들어가면 사고 싶었던 도깨비상이 있곤 했어요.”

이런 경험이 무속인인 김씨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30년간 집, 자동차, 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약 30만점 모은 최웅규씨(55·화랑 대표). 그는 오래 전에 정말로 소장하고 싶은 책을 발견했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책은 거짓말처럼 20년이 지난 뒤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최씨에게 돌아왔다.

김응수씨의 만화책 1만권은 경기 남양주시의 김씨 집 지하창고에 가지런히 쌓여 있다. 김씨는 더 많은 사람이 그의 수집품을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사정은 간단치 않다.

“지난해 8월에 제 만화책 일부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감동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온종일 녹초가 될 지경이었지요. ‘내가 큰일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물관이 아쉽더라고요.”

자신이 피붙이처럼 모은 물건을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자신과 같은 감동과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수집가들의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개인 박물관을 만든다.

김동휘옹은 90년대 중반 자기 소유의 병원을 팔아 박물관을 짓겠다고 가족에게 선언했다. 당연히 자식들에게 돌아갈 유산도 없었다. 부인도 “못할 게 뭐 있어요. 우리 나중에 밥 먹을 정도의 돈만 남기고 박물관 합시다”라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97년에 지금의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백성현 교수는 올해 5월 서울 대학로에 ‘로봇박물관(02-741-8861∼2)’을 세웠다. 백 교수는 “다섯 살 먹은 아이가 세 번이나 들르는 것을 볼 때, 세계적인 수집가들이 와서 보고는 놀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자신이 모은 도깨비상들만 바라봐도 뿌듯함을 느낀다는 김재연씨도 올해 남양주시에 도깨비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박물관 지을 돈도 없고 수집품 관리에도 한계를 느끼던 김씨에게 독지가가 나타난 것이다. 김씨는 “결국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교과서, 책걸상, 교탁, 학생증 등 학교 관련 자료에서부터 라면봉지를 이어서 만든 상보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를 말해주는 생활자료를 30만∼40만점 소장한 최웅규씨는 전시회에 대한 남다른 기억이 있다. 특히 9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의 수집품 2만점을 이용해 50, 60년대의 인천 거리를 재현하자 교민들은 “고국에 온 것 같다”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김동휘옹의 등잔박물관에 전시된 등잔들에는 시대 구분 말고는 별다른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

“등잔을 보면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넌 어디 있던 거냐. 주인은 뭐하는 사람이었냐. 네가 켜있을 때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었느냐.’ 그럼 등잔은 대답을 합니다. 관람객의 머릿속에서요. 대화가 이뤄지는 거지요.”

이들은 자신의 수집품들이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취재에는 대학생 인턴기자 고경범(27·고려대 불문4) 고서연(22·서울대 외교4) 권미리(20·이화여대 영문3) 박현석씨(25·연세대 영문3)가 참여하였습니다.)

글=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사진=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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