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을바람 불면 김환기가 온다

  • 입력 2004년 7월 25일 17시 50분


1959년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김 화백은 이보다 4년 전 파리에 먼저 가 있던 김 여사에게 자화상을 담은 엽서(아래)를 보내기도 했다.-사진제공 환기미술관
1959년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김 화백은 이보다 4년 전 파리에 먼저 가 있던 김 여사에게 자화상을 담은 엽서(아래)를 보내기도 했다.-사진제공 환기미술관
《25일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거목이었던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의 30주기 되는 날이었다. 매년 이날이 되면 누가 연락하지 않아도 낮 12시 미국 뉴욕 맨해튼 북쪽 외곽에 있는 묘지로 참배객들이 모여든다. 30년 전 수화가 숨을 거둔 맨해튼 웨스트사이드 73가 아파트에서 차로 20∼30분 떨어져 있는 이 묘지에는 올 3월 수화를 따라 저세상으로 간 김향안(金鄕岸) 여사도 나란히 묻혀 있다. 》

올해도 아들 김화영 환기재단 이사장(41)을 비롯해 재미의사 메튜 김 부부, 조각가 한용진씨 등 뉴욕의 지인들과 서울서 날아간 환기미술관(02-391-7701) 박미정 관장까지 묘지 옆에 둘러서서 고인들을 추모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 섬에서 태어난 수화. 그는 평생 떠돌이 인생을 살았으나 결코 한국적 예술혼을 놓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던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일본 도쿄 니혼대에서 그림을 배웠고, 동인 활동을 했으며, 첫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김 여사와 결혼했고, 서울대와 홍익대에서 가르쳤다. 1956년부터 5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광복, 6·25전쟁 등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려 21회의 개인전을 가지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는 오랜 외국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미의식인 자연주의적 정서와 사상, 예술적 세계관을 끝까지 간직했다. 유화라는 서구적 매체를 사용했지만, 표현하려 했던 작품의 소재와 주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것이었다.

김 여사가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세운 환기미술관은 세계박물관대회가 열리는 10월에 맞춰 대규모 30주기 회고전을 기획하고 있다.

1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10월 19일∼11월 14일)에선 수화의 1950, 60년대 구작전과 조선백자 달항아리 전이 열린다. 그의 예술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1950년대 백자와 산, 달, 강 등 자연소재의 작품들과 평생 작품소재로 삼았던 조선백자 달항아리들이 함께 전시된다. 고미술품에도 남다른 감식안을 가졌던 수화는 특히 달항아리 사랑이 지극해 작품을 하다가 잘 안 풀리면 지그시 눈을 감고 백자 항아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2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1월 19일∼12월 31일)는 수화의 뉴욕시대(1963∼1974) 사진들과 유품 및 점화(點畵)전이다.

수화는 프랑스에서 1959년 귀국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과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화단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그러나 4년 뒤 홀연히 뉴욕으로 떠난다. 이곳에서 그는 작고할 때까지 11년 동안 단색조 화면에 같은 단위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하는 점화를 그린다.

그의 점화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후기 색면추상(Color Field Painting)과 미니멀아트(Minimal Art) 등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점들을 찍으면서 생각했던 것은 한국의 자연과 추억이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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