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기억에 묻힌 ‘그때 그 친구’

  • 입력 2004년 7월 29일 16시 38분


낡은 사진속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이 꼭 엊그제인 듯 새롭다. 76년 여름 서울 경동고 1학년 사진반 학생들이 경복궁 국립박물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0대의 푸르던 청춘은 이제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사진제공 전부순씨
낡은 사진속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이 꼭 엊그제인 듯 새롭다. 76년 여름 서울 경동고 1학년 사진반 학생들이 경복궁 국립박물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10대의 푸르던 청춘은 이제 4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사진제공 전부순씨
《“위아래로 5000년이나 되는 시간 속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가로세로 3만 리나 되는 넓은 땅 위에서 하필이면 함께 태어나 한 나라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약용이 지은 ‘죽란시사서첩’의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꼭 만나리라는 법은 없다. 연배도 맞아야 하고 뜻이 서로 통해야 한다. 친구가 된다는 것, 그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30, 40대 남녀 100명에게 그들의 친구에 대해 물었다. 학교를 떠나 사회로 나선 지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이 넘은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의 친구는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친구가 남아있고 누가 새로 들어왔는가.》

○ 어린 시절 단짝 어디있을까

어린 시절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걷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친구는 ‘앞서서 걷거나 따라오는 게 아니라 옆에서 걷는’ 존재다. 사진집 ‘Friendship’ 중에서. -동아일보 자료사진

죽마고우(竹馬故友)는 ‘대나무 말을 타며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구라는 의미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나거나 학업이나 직장 생활 때문에 도시로 나오는 경우가 늘면서 죽마고우가 아직 남아있을지 궁금했다.

‘생일 파티에 부르고 싶은 친구 10명을 꼽아보라’는 질문으로 설문을 시작했다.

총 100명에게 물었으니 1000명 가까운 친구가 모였는데 고향 친구와 초등학교 친구라는 응답을 더해도 11%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대학 시절 만난 친구가 39%로 가장 많았고 직장을 비롯해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29%였다. 열에 일곱은 대학 이후 사귀게 된 친구라는 의미다.

이가영화사 대표 이희주씨(35·여)는 “학교 친구들보다 일과 관계된 사회 친구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게 씁쓸하다”며 “과거를 추억하고 향수를 되살리는 시간보다 현재를 공유하고 고민이 통하는 이들과 만나는 게 더 편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에 반해 장성아씨(35·여·오리콤 차장)는 여전히 친구들 대부분이 고향 친구인 경우. 장씨는 “고향 친구들은 명절에 내려갈 때나 만나지만 사회에서 진정한 친구 사귀는 게 어렵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번 설문 결과에서 가장 친한 친구(1번으로 꼽은 친구)만 놓고 보면 죽마고우(초등학교+ 고향 친구)의 비중이 11%에서 19%로 올라갔다.

○ 자주 만나야 더 친해진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사회나 직장에서 만난 친구가 많다는 것은 자주 만나야 더 친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설문 결과를 보면 친구들을 1∼3개월에 한 번 정도 만난다는 응답이 45%로 가장 많았다. 1개월보다 자주 만나는 경우는 24%였고 1년에 한 번 만난다는 응답도 10%나 됐다. 물론 이는 100명의 응답자가 각각 뽑은 10명의 친구를 만나는 빈도를 단순 총합한 것이지만 대체적인 경향을 짐작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가장 친한 친구(1번으로 꼽은 친구)는 1개월에 한 번 이상 만난다는 응답의 비율이 66%로 올라갔다.

e브레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진세씨(45·남)는 “설문에 답하고 보니 가장 친한 친구조차 3개월에 한 번 만나기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됐다”며 “정말 친한 친구라고 내세울 수 있는지 회의가 들 정도”라며 안타까워했다.

브랜드 컨설턴트인 박주형씨(30·여)는 “자주 못 만나고 연락 못해도 마음속에 먼저 떠오르는 친구가 있고 자주 보고 매일 전화해도 나중에야 생각나는 친구도 있다”고 답변했다. 만나는 빈도와 친한 정도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 친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최근 한 TV 맥주 광고에선 누워있던 친구들 가운데 한 명이 불쑥 말을 꺼낸다.

“야, 너희들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냐?”

“미쳤냐?”

“그럼 우린 뭔데?”

“그냥 친구.”

광고에선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결론짓는다. 그냥 친구라, 친구에도 종류가 있는가.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순간에 떠오르는 친구, 두 번째 질문인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할(연락했던) 친구’가 바로 그런 친구가 아닐까.

이 질문에 죽마고우를 꼽은 사람은 20명으로 전체에서 죽마고우가 차지하는 비중(11%)보다 월등히 높았다. 응답자의 절반인 45명은 가장 친한 친구와 이 항목의 친구가 같다고 답했다. 답을 못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 빈칸으로 남겨둔 경우도 4명 있었다.

반면 다른 질문(새벽에 편하게 불러내거나, 존경하거나, 둘이 몇 시간을 얘기해도 지루하지 않을 친구)에서 죽마고우의 비중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특이한 사실은 지루하지 않을 친구 항목에 이성 친구를 꼽은 경우가 20명이나 됐다는 점. 부모님 상(5명), 존경(3명), 새벽(6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 에필로그

참으로 잔인한 설문이었다. “친구는 순서를 매기는 게 아니다”라는 점잖은 항의가 쏟아졌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직접 설문에 대해 답을 해봤다. 1번 문항에서 막혔다. 가장 앞자리에 이름을 적어야 할 친구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머릿속에서 여러 명의 이름이 맴돌고 있다.

이번 설문에 답하면서 ‘친구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는 의견도 많았다. 자주 만나는 게 친구인가,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친구인가.

“친한 사람이 친구는 아니다”(채수진씨·34·여·영화제작 프로듀서)라거나 “자주 만나지만 마음속의 친구가 아닌 사람이 있고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진정한 친구가 있다”(안우길씨·30·하나로드림 과장)는 의견들은 ‘친하다’라는 형용사와 ‘친구’라는 명사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엿보게 한다.

어쨌든 독자 여러분도 친구 10명을 뽑아 얼마나 자주 연락하고 사는지 한번 적어보시라. 그리고 친구의 의미를 고민하면서 지금 당장 안부 전화라도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떨지.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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