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급 음식? 자기가 저급인 주제에!”(MBC ‘황태자의 첫사랑’의 성유리)
학벌, 외모, 집안 등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여자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터프해졌다.
‘미모’가 신데렐라의 무기임에도 ‘썩 예쁘지 않다’는 설정도 뜻밖이지만 험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주먹질을 마다 않는 당돌함은 더욱 낯설다. SBS ‘파리의 연인’에서 강태영(김정은)은 재벌가에서 헤어지라며 돈 봉투를 건네자 상처받기는커녕 “액수가 너무 적은 것 아냐”라며 장난스레 눈알을 굴리기도 한다.
물바가지를 뒤집어쓰고도 아무 말 못하던 ‘유리구두’(SBS·2002년)의 선우(김현주), 지갑을 훔쳤다는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뺨 맞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토마토’(SBS·1999년)의 한이(김희선)와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터프 신데렐라’다.
● 터프 신데렐라
‘풀하우스’의 주인공 한지은(송혜교)은 신비롭거나 섹시하거나 착해 빠진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극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의 한류 스타 이영재(비)와의 결혼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영재 오빠가 아깝다” “숏다리더라”라며 입방아를 찧는다.
하지만 기죽지 않는다. 영재의 부모가 사는 서울 성북동 저택에 불려간 지은. 손주며느릿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영재 할머니와 맹랑한 지은의 문답이 이어진다.
“학교는 어디 나왔어.” “영지고등학교 졸업했습니다.”
“왜 공부를 거기까지밖에 못했어?” “학교 때 공부를 별로 못했거든요.”
“근데, 영재랑은 벌써 같이 살고 있다면서.” “네.”
이 당돌한 대답에 혈압이 오르는 쪽은 할머니다.
SBS ‘파리의 연인’의 강태영(김정은)도 한기주(박신양)와 결혼하려 하자 곳곳에서 방해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태영의 연적인 문윤아(오주은)의 어머니가 뺨을 때리자 “저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사람이거든요” 하며 그녀의 팔을 붙든다.
태영은 또 기주의 누나가 “많이 못 배운 것, 부모 없이 자란 것, 뭐 하나 안 걸리는 게 없네요” 하고 가슴에 못을 박자, 나중에 화풀이용 오락기구에 펀치를 날리며 울분을 삭인다.
“야 한기주! 너 뭐가 그렇게 잘났어. 친척은 더 없냐. 다 나와!”
MBC ‘황태자의 첫사랑’의 김유빈(성유리)도 ‘왕자’ 앞에서 당당하다. 리조트 회사의 후계자인 최건희(차태현)가 라면이 먹기 싫다며 “난 이런 저급음식 안 먹어” 하면 “자기가 저급인 주제에” 하고 쏘아붙인다.
건희의 친구가 “쟤(김유빈)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거야. 조심해” 하고 건희에게 충고하는 말을 듣고는 득달같이 달려가 바가지로 그 친구의 뒤통수를 갈긴다.
“야, 뺀질이. 네 아버지 뭐하시냐. 뭐가 그렇게 바빠서 자식 놈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키우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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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데렐라는 진화한다?
‘황태자…’의 작가 김의찬씨는 “요즘 여성 시청자들은 유머 감각 없으면서 완벽한 여주인공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어 평범하고 코믹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며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줄거리가 진부할 경우 새로운 캐릭터로 승부수를 던진다”고 말했다.
‘파리의 연인’ 제작사인 ‘캐슬 인 더 스카이’의 이상훈 부사장은 “여성이 적극적이고 사회 활동을 많이 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당하는 여성은 남자가 봐도 답답해 먹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는 “남자들이 여자다워지고, 여자가 남자다워지는 현실을 반영해 고정관념을 깬 캐릭터들이 각광받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도 “남자들이 마초 형에서 벗어나는 것에 맞춰 여성의 캐릭터도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이다”고 평가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이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김수연씨(24·고려대 중어중문 4)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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