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국가 중 만주에 형성된 최초의 철기문명 국가로 꼽히는 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를 잇는 연결고리인 동시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5세기까지 존재했던 국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설화는 스스로 부여족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고구려는 졸본부여로 불렸고 백제는 남부여를 자칭했다.
●中 “漢나라 영향받았다”
대략 기원전 2세기에 건국한 부여는 물길족의 침략으로 명맥이 완전히 끊긴 499년까지 700여년간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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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래 삼국 중심의 역사관과 문헌기록의 부족으로 늘 한국사의 변방에 위치해 왔다.
중국 쑹화(松花)강 일대에 자리 잡아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을 무대로 활약했던 부여는 1980년대 동북공정의 기초작업에 착수한 중국학자들이 그 유적을 대규모로 발굴하면서 실체가 좀 더 뚜렷해졌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부여사 찬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대목.
이번 세미나에서 서울대 송기호 교수(사학)는 “1930년대에 시작된 일본의 부여사 연구 이후 지금까지 발표된 순수 부여사 연구 논저 160여편 중 81%가 중국의 것”이라며 그 심각성을 지적했다. 충남대 박양진 교수(고고학)가 분석한 중국측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보더라도 철제무기와 마구(馬具), 구리거울(동경·銅鏡), 화폐 등에서 한(漢)나라의 영향이 강조되고 있다.
●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기원?
이번 세미나에서의 주요 쟁점은 부여의 실체를 두고 △부여와 북부여, 동부여 등 최대 4개로까지 분석이 엇갈리는 점 △동부여의 위치 △전기 부여 왕성의 위치 △고구려와 백제의 부여 기원설 등이었다.
송 교수는 “북부여는 졸본부여(고구려)의 등장을 의식해 기존의 부여에 붙여진 호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동부여는 285년 훗날 전연(前燕)을 세운 선비족의 침공을 받고 피신한 (북)부여의 일족이 두만강 일대(북옥저 지방)에 세운 나라로 봐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보아 전기 부여의 왕성 자리는 지린성 쑹화강 동쪽 기슭의 동단산(東團山) 및 남성자(南城子)고성, 그리고 이들 동쪽에 위치한 모아산(帽兒山)고분군 일대가 유력하다”고 밝혔다.
서영대 인하대 교수(사학)는 “부여는 선비족의 잇단 침략으로 수도를 서쪽으로 옮긴 뒤 그 지역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족을 포섭했으나 북쪽 물길족의 침략을 받으며 서서히 같은 기원을 지닌 고구려에 흡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국대 이기동 교수(사학)는 “부여 연구를 할 때 부족국가냐 중앙집권국가냐 하는 국가의 발달단계를 넘어 종족적 기원과 문화양식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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