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식은 결국 말의 문제입니다. 어떤 말로 과거를 인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8·15’를 패전(敗戰)이라 부르는지, 종전(終戰)이라고 하는지를 보면 ‘8·15’에 대한 인식이 드러납니다. 그런 면에서 말을 다루는 문학과 역사는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고모리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자신의 저서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뿌리와 이파리)에서 히로히토천황이 그날 라디오를 통해 읽은 ‘종전조서’가 어떻게 일본인들을 속였는지 분석한다.
“전쟁의 최대 책임자인 천황은 전쟁의 끝만 말하고 시작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인들이 느껴야 할 가해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었어요. 그 사실을 일본인들이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는 올 6월에는 오에 겐자부로 등 지식인들과 함께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고 군대를 보유하지도 않는다’는 헌법 9조의 개헌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히로히토 천황은 종전조서에서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헌법 9조는 천황이 그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 향후 전쟁을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 그나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따라서 일본이 헌법 9조를 폐기한다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국가적 배신행위라는 것. 고모리 교수는 일본의 개헌 움직임과 자위대 이라크 파병 등에서 과거 천황이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던 내셔널리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나 중국의 역사 서술 문제에서 동아시아에 내셔널리즘의 부활을 알리는 조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중일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힘이 아닌 말로 과거를 화해하고 공동의 과제를 명확히 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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