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한 외조부의 삶을 모티브로 한 소설 ‘8월의 저편’(일본판 제목 ‘8月の果て’)을 본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석간)에 동시 연재할 때도 유씨는 달렸다. 일주일에 이틀, 오르막 산길을 코스에 넣어 30km씩 뛰었다.
유씨가 2년 넘게 씨름한 ‘8월의 저편’은 이달 중 한일 양국에서 동시 출간된다. 8월의 햇볕이 뜨거운 11일 낮 도쿄(東京) 시내에서 작가를 만나 장거리 경주를 끝낸 소감을 들었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이는 장면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육체적 한계상황을 넘어 달릴 때의 내면은 직접 뛰어보지 않으면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이 눈물을 흘리면서 달리고 또 달리는데, 작가가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읽는 분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소설에는 일본군위안부, 창씨개명, 항일운동, 중일전쟁 등 역사적 사실들이 숱하게 등장합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고층건물 옥상 위에서 내려다보면 형체만 있을 뿐 이들의 다양한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라는 것도 비슷해서 개개인의 삶들이 ‘전체’로만 뭉뚱그려져 표현될 뿐 구체적 이야기가 묻혀지고 말지요. 개인과 가족의 사연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역사를 그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제목을 ‘8월의 저편’으로 붙인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8월 15일이 한국에서는 식민지와 독립국 시대를 구분 짓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식의 경계 짓기는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과거와 현재는 8·15를 경계로 단절된 게 아니라 오히려 연결됐다는 뜻에서, 즉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저편’이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조부를 주인공으로 삼은 걸 보면 애정이 대단한 듯합니다. 작고한 손기정 선생과의 인연도 각별하다는데….
“제 이름 미리는 외조부 고향인 밀양의 옛 이름 ‘미리벌’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미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외할아버지는 소설의 화두까지 건네신 셈입니다. 손 선생님에 관한 기억도 작품에 녹아 있어요. 작고하시기 전 손 선생님에게 병문안을 가서 ‘지금도 주무실 때 달리는 꿈을 꾸시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죽어라 달리는 꿈을 꾸는데 자꾸만 눈물이 난다’고 하셨어요.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8월의 저편’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일본어로 썼지만, 주요 배경은 한반도의 시골 마을이고 한국인의 정서가 배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소속은 한국과 일본 중 어느 쪽인가요.
“유미리라는 작가와 같은 운명이 아닐까요. 저의 뿌리는 한국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강물이 한국에서 일본 쪽으로 흘러온 건 맞는데 물줄기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 머문 형국이지요. ‘8월의 저편’이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이야기를 다뤘는데도 양국에서 출간되는 것은 이런 ‘운명’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씨는 ‘물고기의 축제’(1992)로 기시다 구니오(岸田國士) 희곡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에 데뷔했으며 ‘가족시네마’로 1997년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을 수상했다. 그는 외가에 이어 아버지 집안 얘기를 소재로 ‘소설을 통한 뿌리 찾기’를 계속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 '8월의 저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6·25전쟁 등을 배경으로 피지배 민족의 아픔과 인간 군상의 얽히고설킨 인연, 가족사의 곡절 등을 다룬 소설. 작가가 외조부(작중 인물 이우철)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일가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과정 등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2002년 4월부터 본보와 아사히신문에 동시 연재됐으나 이야기의 끝을 맺지 못한 채 올 3월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뒤 이야기가 완성돼 일본의 대형출판사인 신초(新潮)사와 한국의 동아일보사에서 이달 말 동시 출간된다. 한국판은 상, 하 2권(각 450쪽 내외)으로 가격은 각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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