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젠 미래를 말하자]<下>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 입력 2004년 8월 13일 18시 39분


독일의 ‘어젠다 2010’, 싱가포르의 ‘비전 2018’…. 세계 각국이 ‘미래 준비’에 한창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거꾸로 ‘과거’ 문제가 사회의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본보는 ‘한국, 이젠 미래를 말하자’ 시리즈를 끝내면서 미래 문제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을 초청해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도약의 해법을 찾기 위한 좌담회를 가졌다.

소설가 겸 경제평론가인 복거일(卜鉅一)씨와 ‘10년 후, 한국’의 저자인 경제평론가 공병호(孔柄淏)씨는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 회귀적인 논쟁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며 좌파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또 미국을 비판하고 중국을 높이 평가하는 ‘숭중반미(崇中反美)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재산권과 지도자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번 좌담의 사회는 본보 고승철(高承徹) 편집국 부국장이 맡았다.

▽사회=요즘 사회가 과거 지향적으로 흐르고 있다. 왜 지금 이 시점에 과거가 화두가 됐나.

본보가 8·15 특별기획 ‘한국, 이젠 미래를 말하자’ 시리즈와 관련해 마련한 좌담회에 참석한 복거일씨(왼쪽)와 공병호씨. 두 사람은 최근 ‘과거’가 한국 사회 화두가 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가고 있는 위험한 현상”이라며 “국력을 소진하고 갈등을 증폭시켜 결국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원대연기자

▽공병호=갑자기 ‘과거’ 문제가 나온 배경에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개입돼 있다고 본다. 이렇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과거로만 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다.

▽복거일=지금 논란이 되는 친일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서양 문명이 들어와 우리 전통 문명을 압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과 관련돼 있다. 문명사적 맥락에서 넓게 살펴야 모습이 제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요즘 논의 수준은 맥락이 너무 좁다. 한자문명이 서양문명의 무서움을 깨달은 아편전쟁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사회=왜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한가. 왜 우리가 미래지향적이어야 하나.

▽복=우리가 미래에 살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지식을 제공하는 범위 안에서만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를 위한 과거’가 부각되고 있다.

▽공=정치나 사회적 문제를 놓고 논쟁이 가열되면 과거 회귀적 사회가 된다. 반면 기술 기회 도전 모험이 담론의 중심 키워드가 되면 미래지향적 사회가 된다. 창조와 창의, 희망과 낙관은 미래지향 사회에서 나온다.

▽사회=그런 관점에서 보면 요즘 한국 사회는 과거 회귀적 요소가 많아 보인다.

▽공=비전은 정치적 리더십이 만들어 낸다. 요즘 한국 사회는 모래알 같은 사회가 됐다. 모두가 산산이 부서져 분쟁적인 사회가 됐다. 과거사에 얽매인 ‘부관참시(剖棺斬屍)형 사회’로 가고 있다.

▽복=이 시점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는 왜 중국에서 근대화가 시작되지 않았는가의 문제이고, 둘째는 같은 한자문명권 중에서 왜 일본만 근대문명을 빨리 수용했느냐의 문제이다. 지금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할 때다.

▽사회=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

▽복=요즘 많은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은 단기적으로 불가피하다. 현 정권은 근본적으로 좌파 민중주의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지자도 민중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정권이 자기 ‘믿음’대로 하자니 현실에 부닥치고, 합리적인 정책으로 바꾸려고 하면 지지 세력이 반발한다. 시장친화적으로 가려 해도 반대세력은 계속 의심하고, 우호세력으로 돌아서지 않는다. 결국 현 정권은 큰 물줄기를 개척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하루하루 정치적 자산을 덜 잃는 방향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공=세계화가 진척될수록 어중간한 사람과 기업, 중위권 국가들이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급변할 때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는 좌편향주의적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 움직임을 보자. 아무리 사학비리가 문제라지만 사유재산권을 뿌리째 흔드는 일을 추진할 수 있나. 현행 교육제도를 통해 배출되는 젊은이들의 세계를 보는 시각이 바깥세상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도 큰 문제다. 사회의 역동성이 잠식될 수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중간층과 서민층이다. 부자들은 포트폴리오를 선택하듯 국가를 선택할 것이다.

▽복=한국에도 자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와 광복 이후 전쟁을 거치면서 과거의 전통이 깡그리 무너져 과거 전통의 족쇄가 비교적 적다는 것도 자산이다. 관료조직을 포함해 사회의 여러 인프라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효율적인 것도 다행이다.

▽공=우리의 자산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부(富)를 축적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해외 경험을 축적한 인재도 많다. 외국자본 유입으로 개방체제를 갖춘 것도 앞으로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정치권이 어떤 약속을 통해 집권하더라도 이 흐름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자본유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경제학이 발전하면서 사회의 ‘성공 공식’은 이미 나왔다. 바로 재산권 인정이다. 재산권이 확립되면 사회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지금 집권한 세력의 본 마음과 정책은 재산권을 허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공=말을 그만하고 실용주의자가 돼야 한다. 관념론으로는 어떤 사회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형평 논리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삶의 본질은 경쟁이다. 경쟁에 따른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국가 경영을 제대로 잘하기 위한 정치적 리더십의 필요조건은….

▽복=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므로 지도자를 잘 뽑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뽑은 지도자들은 불행하게도 좋은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다. 잘못된 선택의 폐해는 결국 시민에게 돌아간다.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걸맞은 정부를 갖는다’고 말했다.

▽공=지도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당대에 처리해야 할 ‘시대적 소명’을 완수해야 한다. ‘시대적 소명’을 관철하려면 이익집단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올바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뽑는 게 중요하다.

▽사회=19, 20세기에 식민지국가로 있다가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가 드물다. 긴 흐름으로 볼 때 과연 한국이 선진국에 오를 수 있다고 보나.

▽복=선진국 진입 이야기가 나온 시기가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에 이르렀던 김영삼 정권 때였다.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소득은 여전히 1만달러 선인데 선진국은 그 사이 2만달러에서 3만달러가 됐다. 지난 10년 동안 격차가 더 벌어졌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재산권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가 그것을 확실히 보장해야 한다.

▽공=사실 한국이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수준은 기적적이다. 냉전 하에서 ‘불공정 게임’을 잘했고, 타의에 의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결과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 후면 중국이 제조업에서 만들지 못할 제품이 없게 된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겁들을 내지 않는다.

▽사회=한국의 먼 미래를 놓고 볼 때 지정학적 위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복=영토가 붙어 있으면 이해가 충돌하기 마련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늘 존재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영토적 야심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계속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요즘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아내는 데 관심이 많다. 중국은 대단히 공격적인 나라다. 인도와의 국경분쟁, 베트남과의 전쟁을 보면 잘 드러난다. 특히 중국 공산당은 최근 사회주의 정통성이 흔들리자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공격적인 대외정책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 ‘고구려사 논란’은 약과다.

▽공=한국인이 현실주의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는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소국으로서 대국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유지하는가는 우리 후손들의 삶과도 관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모멸감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제 사회에서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이라크 파병도 비용 부담으로 본다.

▽사회=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깊이 있는 분석에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줄 것으로 믿는다.

정리=특별취재팀

▼복거일씨는▼

소설가 겸 경제평론가. 59세. 충남 아산 출신으로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했다. 철저한 실증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해 오고 있다. 작품으로는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소수를 위한 변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등이 있다.

▼공병호씨는▼

경제평론가. 44세. 경남 통영 출신으로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라이스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기업센터와 자유기업원의 초대 소장 및 원장을 지냈다. 활발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해 오고 있다. ‘시장경제’ 전파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는 ‘시장경제와 그 적들’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 ‘10년 후, 한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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