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내 안에 고구려가 있었다

  • 입력 2004년 8월 19일 16시 24분


고구려 장수 온달장군이 성곽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북방영토를 넓힌 이후 또다시 남쪽으로 향했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고구려 장수 온달장군이 성곽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옛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북방영토를 넓힌 이후 또다시 남쪽으로 향했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무심코 보면 동네 뒷산의 이름 없는 돌.

하지만 아는 이에게는 1500여년 전 그들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는 ‘빛바랜 사진’이다.

고·구·려.

멀리 만주나 북한 땅에서나 찾아보려 했던 우리의 옛 나라.

그러나 쓸쓸하고 보잘것없지만 엄연히 이곳 남한 땅에도 그들의 체취는 남아 있다.

시대는 북방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아들 장수왕이 남쪽으로 눈을 돌렸던 5세기경.

남으로, 남으로 거침없이 향하던 고구려인의 기상은 충북 충주 선돌마을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서 아직도 살아 숨쉰다.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사적 제264호)에서는 영양왕 때 장수 온달장군의 흔적이 전설과 함께 전해 내려온다.

아차산 4보루에서 용마산 정상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만난 고구려 유적. 얼핏 돌무더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곽의 흔적이 역력하다.-강병기기자

또 서울에는 475년 장수왕과 백제 개로왕이 서로의 숨줄을 비수같이 겨누며 대립해 있던

아차산성이 있다. 산성 자체는 백제가 세운 것이지만 이후 이곳을 점령한 고구려의 보루들이

요새처럼 자리 잡고 바로 앞 한강 건너편 백제의 몽촌토성을 마주보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아차산 등산로에 올라 길가의 돌덩이, 흙 한줌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말 달리고 함성 지르던 그 시대로 돌아간다.

경기 구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박명섭 소장(66)과 함께 아차산 고전장을 돌아보며

우리들 가까이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더듬어 보았다.》

○ 온달의 향기

아차산 산행은 구리시 명빈묘 쪽에서 시작됐다.

수풀을 헤치고 10여분을 걸으니 나무와 덩굴 속에 성벽 무더기가 보인다. 정식 보루는 아니지만 보루 앞 1차 방어선이라는 말. 가로 약 4m, 높이 50cm 정도의 성벽 잔해. 머릿속에서 성벽을 다시 짓고 이 안에서 창을 들고 서있었을 옛 고구려 병사를 떠올려본다.

아차산은 서울 중랑구와 광진구, 경기 구리시에 걸쳐있는 산. 해발 300여m에 불과하지만 정면으로는 한강을 마주보고 좌우로는 중랑천, 왕숙천을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강 건너 백제의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맞서 있는 고구려의 최전방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이 일대에 세운 보루는 18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구의동 보루를 제외하고 아차산 1∼4, 용마산 1∼7, 망우산 1∼3, 홍련봉 1,2, 시루봉 보루 등 17개 보루가 능선을 따라 염주알처럼 늘어서있다. 보루는 산성보다 작은 진지로 규모에 따라 10∼100명까지 주둔했다는 박 소장의 설명.

이곳 아차산에도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장군이 출정에 앞서 “계립현(문경새재 동북쪽에 있는 고개)과 죽령 서쪽의 땅을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후 아단성에서 전사하자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이에 평강공주가 “생사는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가소서”라고 하자 비로소 영구가 움직였다고 한다.

아단성이 지금의 어디인지에 대해 아차산이라는 주장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이 전설을 토대로 아차산이 있는 구리시에서는 매년 10월 온달장군 추모제가 열린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온달산성 쪽에 무게를 둔다. 둘레 683m의 이 산성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해 고대 성곽 축성법을 잘 알 수 있다.

온달산성 바로 아래에는 천연 석회석 동굴인 온달동굴(천연기념물 261호)이 있다. 온달은 계립현과 죽령을 지키던 장수였으며 신라군을 막기 위해 산성을 쌓고 동굴에서 수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차산 제4보루 복원조감도. -자료제공 구리문화원

○ 몸으로 느끼는 역사

찌는 듯한 더위를 뚫고 다시 아차산 4보루 정상에 오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휑한 헬기장뿐. 다소 실망한 기자에게 박 소장은 “1997년 발굴이 이뤄졌지만 보존하려면 막대한 경비가 들기 때문에 다시 묻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곳곳에 출토된 유물과 장소에 대한 설명을 써 놓은 안내판이 보였다. 아무 의지할 것 없던 고구려 탐사 길에서 그나마 도움이 된다.

발굴 당시 높이 4m, 둘레 200여m의 성벽 안에서 토기, 철기류 등 800여개의 유물이 출토됐다고 한다. 유물은 서울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역사의 숨결은 그대로 느껴진다. 바로 앞 한강 너머 백제의 풍납토성을 마주한 고구려 병사들의 긴장감은 어떠했을까.

바로 뒤로는 용마산 자락을 따라 보루들이 줄지어 있다. 용마산 바로 아래로는 중랑천이 흐르며 조금만 눈을 들면 멀리 서울 남산과 여의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럴듯한 유적을 기대한 이들에게는 아차산 유적이 초라하기 그지없겠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어렵지 않게 북방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유적을 보고 싶다면 충북 충주시 선돌마을의 중원 고구려비를 찾아갈 수도 있다. 남한 내 유일한 고구려비인 이 비석은 높이 203cm, 너비 55cm 크기로 1979년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찾아갔을 때 냇가에 쓰러져 빨랫돌로 사용됐다고 한다.

오랫동안 빨랫돌로 사용된 탓인지 두 면의 글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남은 면에서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나와 고구려 유적인 것으로 증명됐다는 것. 안타깝게도 쓰러진 상태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지금 서 있는 위치가 정확한 장소인지는 알 길이 없단다.

중국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왕비와 비슷한 형태로 예서체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가 한강 상류까지 국경을 넓힌 뒤 그 기념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 말하지 않는 것들의 음성

3보루로 이동했다. 길쭉한 관모양의 돌들이 곳곳에 나타났다. 한 등산객이 그 위에 앉아 땀을 닦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모양이어서 박 소장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개는 삼국시대 이 곳에서 전사하거나 숨진 병사들의 무덤 덮개로 쓰인 것이라고 한다.

옛 유적이면서도 유적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땅 위에 5∼10cm 높이로 조그맣게 빙 둘러선 돌 조각 안에 담배꽁초가 널려 있었다. 박 소장 말로는 보루의 굴뚝 윗부분인데 흙으로 다시 덮어놓아 그만큼만 보인다는 것이다.

고구려 굴뚝을 재떨이로 이용하는 사람들….

모르고 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내버려진 유적이 얼마나 될까.

학자들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4보루를 발굴한 고려대 최종택 교수(고고미술 사학과)는 장수왕이 백제 한성을 함락하고 철수한 후 보루들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수왕은 당시 3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개성, 파주, 상계동, 중랑천을 따라 남진해 아차산 기슭에 진을 쳤으며 곧 백제의 개로왕을 붙잡아 이 아차산 아래서 목을 베었다.

이곳 보루 중 일부는 6·25전쟁 당시에도 격전이 벌어졌던 곳. 현재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홍련봉 1보루에서도 M1 실탄이 나왔다. 역사가 과거의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다.

전략적 요충지를 보는 안목은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 년 전 한 군부대의 장교가 아차산에 진지 구축 장소를 정하고 살펴보니 대부분 고구려의 보루와 일치했다고 한다.

물론 현재의 진지는 돌 대신 폐타이어로 만들어져 있어 장중한 느낌은 주지 못한다.

‘저 폐타이어들은 1000년 후 뭘 말해주려나….’ 부질없는 단상이 스치고 지나간다.

2보루에서 홍련봉으로 가다가 샛길로 빠지면 ‘온달샘’이 나타난다. 실제로 온달이 여기서 물을 먹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아는 만큼 보이나니…

아차산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홍련 1보루는 현재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50여명이 주둔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곳에 도착하니 영화, TV에서나 봄직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곳곳에 늘어선 성벽과 건물벽, 출토된 파편을 정성스레 닦는 사람들,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덮어놓은 거대한 푸른 천….

발굴 현장을 지휘하는 최 교수는 보루 발굴을 통해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구려군의 편제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부질없는 짓. 그랬더라면 ‘지금의 휴전선이 대동강이나 압록강이 됐을 테고’ 하는 가정도 참 우스운 상상이다. 하지만 신라 본위의 역사에서 고구려 본위의 역사로 국사가 바뀐다면?

“그럼 김유신이나 김춘추 같은 사람의 평가가 전혀 달라지겠죠.” 최 교수의 대답이다.

요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둘러싸고 나라 안이 온통 들끓고 있다.

내 옆의 고구려 유적이 발로 차이고 사라져 가는데 무슨 염치로 ‘우리 역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뇌리를 스친다.

산행을 마친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넘어진 탓에 피까지 흐른다. 하지만 몰랐다면 평범한 등산으로 끝났을 길이 알고 나니 좀 거창하지만 ‘고구려 유적 탐사’라는 이름을 붙일 만했다.

옛사람이 그랬던가. ‘사랑을 하게 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전과 다르리라’고….

글=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

▼아차산 가는길은?▼

아차산은 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등산 코스. 산이 낮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아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구려 유적 외에도 백제가 쌓은 아차산성(사적 234호), 의상대사가 수련했다는 천연 암굴, 대성암, 고려시대의 3층 석탑과 기타 석곽분, 강신샘 등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로 나온 뒤 장로교 신학대까지 걸어오면 아차산 공원에 닿는데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등산코스다.

공원 주차장 바로 옆 5분 거리에 홍련봉 1, 2보루가 있으며 맞은편으로 아차산 제1보루로 이어진다. 아차산 1보루부터 4보루까지는 약 3시간 정도 소요. 용마산과 망우산 보루까지 보려면 한나절 이상은 잡아야 한다. 곳곳에 표지판이 있어 길을 잃거나 못 찾을 일은 없다.

고구려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10월 30일까지 서울랜드 제1전시실에서 열리는 ‘세계유산 고구려 특별전’을 보는 것도 좋다. 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주최로 중국이 세계유산에 신청하기 위해 지난해 대대적으로 발굴한 고구려 유산 사진, 방탄유리에 갇힌 광개토대왕비 등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아차산 답사 문의 구리시청 문화공보과 031-550-2068, 고구려 특별전 문의 서울랜드 02-504-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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