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그때 그시절엔]<6>화가 사석원씨와 검은색

  • 입력 2004년 8월 29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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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80년대는 검은색의 시대였다. 교복도, 박인희의 긴 머리칼도, 출석부도 검은색이었다. 올리비아 허시(왼쪽)나 진추하의 새까만 눈동자는 당시 젊은 세대의 우상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70, 80년대는 검은색의 시대였다. 교복도, 박인희의 긴 머리칼도, 출석부도 검은색이었다. 올리비아 허시(왼쪽)나 진추하의 새까만 눈동자는 당시 젊은 세대의 우상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74년 여름이었다. 서해안에 있는 덕적도로 여행을 갔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그때 바다를 처음 봤다. 지금은 영어강사로 유명한 같은 반 오성식과 또 다른 급우 김명국, 이천직과 함께였다.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자는데 밤에 비가 와서 텐트에 걸어 둔 빨래를 걷으러 나갔다가 통행금지 위반이라고 해안초병들에게 붙잡혀갔다.

어처구니없는 초병들의 횡포였다. 그때 산 너머에 있는 초소로 끌려가면서 본 밤바다가 너무나 검었다. 초병에 끌려가는 공포보다도 밤바다의 검은색에 어린 나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 핸가, 그 다음 해인가 홍콩배우 진추하의 ‘사랑의 스잔나’란 영화가 개봉됐다. 58년생 개띠 이전이 올리비아 허시에 열광하던 세대라면 60년생 쥐띠는 진추하의 세대다. 어쨌든 허시나 진추하나 새까만 검은 눈동자를 가졌다. 덕적도에서 본 서해의 밤바다처럼 말이다. 또 그녀들의 검고 긴 머리칼이란….

검고 긴 머리칼 하면 가수 ‘박인희’도 빠지지 않았다. 파리한 얼굴로 그녀가 부른 ‘모닥불’이나 김정호의 ‘긴 머리 소녀’는 까까머리 중학생들을 설레게 했던 아름다운 노래들이었다.

사춘기가 되었다.

손거울로 몰래 여선생님의 치마 속을 들여다 보다 걸린 급우는 출석부로 엉망이 되도록 맞았다. 그 출석부란 게 검은 색의 크고 길쭉한 모양이었다. 그 검정 출석부로 참으로 많이들 맞았다. 출석부 뿐 아니라 모든 서류의 표지는 검은 색이었고 거리의 자가용 세단도 열이면 아홉은 검정이었다. TV로 보는 권투시합에서 흐르던 코피도 검은 색이었다.

고3 때 화실 선생님을 따라 이른바 ‘방석집’이란 델 갔다. 검정 교복을 입은 채였다. 젓가락 두드리던 아가씨의 검은 색 월남치마가 생각난다. 검은 치마의 지퍼는 고장이 나서 헤 벌레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속으로 희끄무레한 속옷이 보였다. 그날 난, 여자들 브래지어도 검은 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대학 입학시험 날이었다. 점심시간 때 이홍원 선배가 와서 장충동의 순대국 집에서 점심을 사주셨다. 순대국집 이름이 ‘쌍과부집’이었다. 아줌마 두 분 이상이 가게를 보시면 사실관계를 떠나 대개는 쌍과부집이라고 불렸다. 그때 그 집 벽 한 편에 쌓아둔 검은 연탄들. 겨울철엔 가게나 집안에 쌓아둔 연탄의 숫자로 ‘부(富)’를 측정하던 시절이었다.

입학을 하고 대학에서의 첫 축제를 맞았다. 쌍쌍파티 때 같이 갈 파트너를 못 구한 홍익대 다니던 친구는 홍대 앞을 다니던 7번 버스 안내양에게 부탁을 했다. 검정 모자에 검정 유니폼을 입은 그녀가 한 말은 “배차시간이 안 맞아 못가겠어요”였다.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가끔은 종각의 ‘마부’나 명동의 ‘마이 하우스’ 같은 고고장엘 갔다. 그때 우리의 복장은 군복을 검게 물들인 전투복이란 바지와 검은색 군화였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4년 내내 입었다.

나와는 60년생 동갑이며 서해의 밤바다를 보고 자란 시인 ‘기형도’가 종로3가의 한 심야극장에서 새벽에 숨진 채로 발견됐다. 1989년 3월 7일의 일이다. 그를 아끼던 지인들이 유작시들을 모아 시집을 냈는데 시집 이름이 ‘입속의 검은 잎’ 이었다. 어두운 80년대를 노래했던 진혼곡인 셈이었다. 검은색과 함께했던 나의 70, 80년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우울한 세월이었지만 검은색이 난무하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다.

그때 그 사람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거뭇거뭇 추억들이 피어난다.

▼사석원씨는?▼

△1960년 서울 생 △1984년 동국대 예술대학원 졸업 △86년 프랑스 파리8대학 석사학위 △1984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 △서울 파리 도쿄에서 35차례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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