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폭에 쓰여 있는 글씨는 틀림없이 한왕(韓王) 성(成)이 쓴 것이었다. 오래 그 밑에서 사도(司徒)로 일해 온 장량은 한눈에 그 글씨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보니, 글을 보내온 때도, 전해오는 방식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장량은 진작부터 한왕 성에게 구실을 만들어 팽성을 빠져 나오도록 권해왔다. 그런데 성은 몸을 빼내기는커녕 오히려 장량을 팽성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또 비록 열후(列侯)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한왕 성에게는 아직도 수족같이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글을 가지고 온 사자는 그들이 아니라 항왕(項王)의 근신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방금 항왕이 의제(義帝)를 장사(長沙)로 내쫓아 팽성 안의 인심이 흉흉한 때에 한왕이 이리도 급하게 나를 팽성으로 불러들일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도 믿을만한 신하들을 제쳐두고 항왕의 근신을 시켜….틀림없이 무슨 변고가 있다. 이는 결코 한왕의 부름이 아니다.)
헤아림이 거기에 미치자 장량에게 퍼뜩 짚여오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장량은 조금도 내색 않고 항왕이 보낸 사자에게 말했다.
“알겠소. 비록 지금은 열후이시나 한때는 한(韓)나라의 사도로서 임금으로 받들던 분의 명이시니 내 어찌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소? 그러나 떠나기 전에 반드시 처결해야할 일도 있고, 또 먼 길 떠날 채비도 해야 하니 내게 반나절만 말미를 주시오.”
그리고는 사자를 객관으로 안내한 뒤 부중(府中)의 사람을 불러 명하였다.
“팽성에서 오신 사자이시다. 내 한다만 일을 마무리 짓고, 짐을 쌀 때가지 정성껏 접대 하여라. 좋은 술과 맛난 고기를 아끼지 말고 아리따운 여자도 두엇 들여 주어라.”
명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하니 팽성에서 온 사자는 그 뜻 아니한 환대에 깜빡 넘어가고 말았다. 오래잖아 술과 미인에 취해 장량의 채비가 너무 빨리 끝날까 오히려 걱정하였다.
그 사이 약간의 금은만 챙긴 장량이 빠른 말을 골라 타고 부중을 나서며 다시 사람을 팽성에서 온 사자에게 보냈다.
“사도께서 이르시기를, 아직 보살펴야할 일이 적지 아니 남은 데다 곧 날이 저무니 차라리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시는 게 낫겠다고 하십니다. 왕사(王使)께서는 이대로 하룻밤 쉬시면서 우리 한나라의 풍류에나 흠뻑 젖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사도께서도 밤이 깊기 전에 이리로 와서 함께 어울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한껏 흥이 올라 있던 사자는 그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거기다가 미녀들이 짐짓 권하는 술에 이기지 못해 장량이 오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곯아 떨어졌다.
한편 이미 날이 저물기 전에 양적을 떠난 장량은 밤새 지름길을 달려 함곡관으로 향했다. 그곳만 지나면 아무 일없이 한왕 유방이 있는 관중으로 들 수 있었다.
(아마도 한왕(韓王) 성(成)은 죽었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처지에 빠져있을 것이다. 조상에게 면목 없는 일이지만 더는 주인으로 섬길래야 섬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랴. 이제는 한왕(漢王) 유방에게로 가 그에게 내 삶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진작부터 내 주인은 한왕 유방이었는지도 모른다…)
닫는 말에 채찍질을 더하면서 장량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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