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45>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8월 31일 18시 20분


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彭城에 깃드는 어둠(12)

항왕이 장량을 데려오라고 양적(陽翟)으로 보낸 사자는 다음 날 해가 높이 떠오른 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흐릿한 머리로도 간밤 끝내 장량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떠오르자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난 사자는 부중(府中) 사람들을 불러 장량을 불러오게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장량은 오지 않았다. 그제야 급한 마음이 들어 부중 사람들을 다그쳤으나, 장량이 전날 해질녘 말을 타고 부중을 나선 것뿐, 아무도 그 간 곳을 알지 못했다.

놀란 사자는 급히 한왕(韓王) 정창(鄭昌)에게로 달려가 팽성에서 있었던 일과 아울러 장량이 사라진 것을 알렸다. 사자의 말을 듣고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짐작한 정창이 급히 군사를 풀어 장량을 뒤쫓게 했다. 함곡관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진작부터 알아둔 지름길로 밤길을 재촉해 달아난 장량을 다음 날 해가 높이 솟은 뒤에야 뒤쫓아 간 군사들이 따라잡을 길은 없었다.

사자는 죽을상을 하고 팽성으로 돌아가 항왕에게 장량이 달아난 일을 알렸다. 항왕이 사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위사(衛士)들은 어딜 갔는가? 어서 저 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그리고는 범증을 불러들이게 했다.

“아부(亞父), 장량이 눈치를 채고 관중으로 달아났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차라리 전영(田榮)은 미뤄두고 유방부터 치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항왕이 그렇게 묻자 범증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대군이 관중에 있었을 때는 마땅히 그랬어야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유방은 당분간 관중에 묶어두고, 먼저 제나라부터 평정하신 뒤에 따로 도모하셔야 합니다.”

“만약 유방이 함곡관을 나와 뒷덜미를 치면 어찌 하시겠소?”

“유방은 방금 힘들여 삼진(三秦)을 차지한 뒤라 그 군사는 지치고 물자도 넉넉지 못할 것입니다. 한왕 정창을 한 번 더 다그쳐 굳게 무관(武關)을 지키게 하고, 따로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에게는 함곡관을 막게 하십시오. 하남왕이 섬성(陝城)에 대군을 내어 길목을 지키면 유방이 비록 함곡관을 나온다 해도 쉽게 관동으로 밀고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에 항왕은 빠른 말을 탄 사자를 정창과 신양에게 보내 서쪽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자신은 동북으로 대군을 낼 채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자니 다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장사 침현에 있는 의제(義帝)였다. 궁벽한 곳으로 몰아두기는 했으나, 언제 되잖은 것들이 근왕(勤王)을 구실로 의제를 끼고 자신의 등줄기에 칼을 들이댈지 몰랐다.

항왕은 다시 범증을 불러 의논하고 싶었으나 그 일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범증은 아직도 항왕이 의제를 팽성에 두고 황제로 떠받들지 않는 걸 못마땅하게 여길 만큼 옛 초나라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공연히 범증과 의논했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홀로 머리를 짜낸 끝에 항왕은 구강왕(九江王) 경포(경布)와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그리고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에게 몰래 사자를 보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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