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말 술을 좋아한다고 할 만한 인물을 만났다. 30대 중반인 그는 기자가 초대받아 갔던 모임의 호스트였다. 저녁 먹자고 모인 자리였는데 모두 4가지 종류의 술이 나왔다. 화이트와 레드 와인, 위스키, 이탈리아의 브랜디 그라파.
그라파 전용 글라스를 그날 처음 봤다. 크리스털 제품이었는데 목이 15cm쯤 될 정도로 길고 잔은 일반 브랜디 잔보다 훨씬 작았다. 해외 출장길에 발견하곤 바로 사서 품에 안고 왔다고 했다. 두 가지 와인 모두 매우 강한 인상을 줬는데 특히 화이트 와인은 그가 12년 전에 한 박스를 구입해서 보관하던 것 가운데 마지막 남은 병이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위스키인 맥켈란 12년산. 술도 좋았지만 들러리로 가격이 더 비싼 위스키가 한 병 더 나온 게 압권이었다. 그 위스키는 한국에서 높은 분들이 많이 찾기로 유명한 제품이었는데 이날은 비교 시음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는 뜨거운 물을 준비해서 각자가 위스키를 마신 직후 입에 한 모금씩 머금게 했다. 향을 더욱 뚜렷하게 느껴보라는 배려였는데 표정이 마치 의식(儀式)을 집전하는 제사장처럼 경건했다.
주위에서 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거개가 둘 중의 하나다. 술 마시는 행위, 즉 술자리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취한 상태를 좋아한다(물론 둘 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술 마신 다음 날 “그 집 (음식 맛이나 분위기) 어땠다”라고 회고한다. 후자가 “술 한 잔 했다”라고 할 때 ‘술’은 ‘A사가 생산한, 무엇을 원료로 어떤 공정을 거친, 바로 그 술’이 아니라 그저 ‘알코올’과 동의어일 뿐이다.
1인당 술 소비량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국이지만 술은 늘 주변에서 맴돈다. 주권(酒權) 회복 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술이 술자리의 주인이 되는 그날까지, 투쟁!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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