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역사와의 대화]<15·끝>산송

  • 입력 2004년 9월 6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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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선비 유이좌 집안에서 관에 올린 산송 소지. 왼쪽 아래의 굵은 초서부분은 진정내용에 대해 관에서 처분한 내용(뎨김)이다. 권재현기자
안동 선비 유이좌 집안에서 관에 올린 산송 소지. 왼쪽 아래의 굵은 초서부분은 진정내용에 대해 관에서 처분한 내용(뎨김)이다. 권재현기자
민간에서 관에 올려진 민원성(民願性) 고문서를 가리켜 소지(所志)라고 한다. 이 소지류는 토지에 관한 문서 다음으로 많을 정도로 고문서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지류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묘지와 관련된 다툼, 즉 산송(山訟)에 관한 진정서라는 점이다.

안동 하회마을 화경당 유씨(和敬堂 柳氏) 문중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문서 가운데도 이 산송과 관련된 재미있는 문서가 들어 있다. 보통 산송 관련 소지는 투장(偸葬·다른 집안 무덤에 시신을 암장하는 행위)과 연관된 진정서가 대부분이나 이 소지는 절과의 다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814년(순조 14년) 봄 안동 선비 유이좌는 부친상을 당하자 인근 예천 지역에 있는 대곡사(大谷寺) 부근에 터를 정하고 승려들의 양해를 얻어 그곳에 부친의 묘를 썼다. 그리고 부근의 허물어져 가는 암자를 보수해 승려들이 기거하도록 배려하고는 아울러 묘소 관리도 부탁했다. 또 5년 뒤에는 300냥의 거금을 희사해 그 이자로 절에서 국가에 바치는 조세의 경비에 보태도록 하는 등 묘소관리를 위해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사단은 묘를 쓴 지 14년 후인 1828년(순조 28년)에 벌어졌다. 당시 대곡사에 있던 태영(泰永)이라는 승려가 양반 두 사람과 모의해 분묘 위치를 문제 삼아 격쟁(擊錚·왕의 행차 때 징을 울려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도(道)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모든 것이 돈을 뜯어내기 위한 무고로 밝혀졌고, 그에 따라 태영은 거제도로 유배 갔다.

그러자 화경당에서는 다음 해(1829년) 정월 이 일을 관에 진정해 행여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분묘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공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소지의 좌측 하단에 부기(附記)돼 있는 관의 처분내용을 보면, 당시 이 사건은 관에서 화경당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묘지에 대한 권리를 배타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으로 종결되었던 듯하다.

조상 묘에 대한 선조들의 이런 지대한 관심은 단순히 자신의 핏줄에 대한 애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인 생명들은 유한하지만 시간을 통해 이어가는 전체 생명의 질서는 영원하다는, 삶의 본질에 대한 유교적 통찰이 사상적 배경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지 가운데 산송 관련 문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문화사적 맥락이다.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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