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구두와 사랑에 빠지다

  • 입력 2004년 9월 9일 16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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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왜 구두에 집착하는가. 아름다운 구두는 여자에게 ‘패션의 완성’인 동시에 여성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로서 에로틱함의 상징이 된다. 모델:김소희, 구두:지미 추 ,의상:캘빈 클라인, 장소협찬:롯데호텔-강병기기자
여자들은 왜 구두에 집착하는가. 아름다운 구두는 여자에게 ‘패션의 완성’인 동시에 여성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로서 에로틱함의 상징이 된다. 모델:김소희, 구두:지미 추 ,의상:캘빈 클라인, 장소협찬:롯데호텔-강병기기자
《톡톡 튀는 말솜씨만큼이나 패션 감각이 뛰어난 방송인 최은경씨(31).

다른 여학생들이 검은색 단화만 신고 다녔던 고등학교 시절, 용감하게도 진한 다홍색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에게 걸려 조회시간 내내 전교생 앞에서 한쪽 신발만 신은 채 서 있어야 했다.

요즘 최씨는 하이힐만 40켤레 이상 갖고 있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슈어홀릭(shoeaholic)’이다. 173cm의 큰 키에도 10cm 이상의 아찔한 스틸레토 힐을 즐기는 최씨는 “힐이 주는 자신감을 맛보고 나면 도저히 힐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고 말한다.》

스타일리스트 정유승씨(36)가 가진 구두는 100켤레에 가깝다. 그의 신발장은 가히 ‘구두 콜렉션’이라 부를 만하다. 그 중에는 반포 고속터미널 앞 지하상가에서 산 1만원짜리 펌프스도 있고 이탈리아 브랜드인 비치니에서 산 보석 박힌 90만원짜리 스트랩 슈즈도 있다. 편한 신발을 따로 싸가지고 다니면서까지 하이힐을 포기하지 못하는 그 역시 슈어홀릭.

밀라노 출장 때의 일이다. 밤에 하이힐을 신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굽 밑부분이 빠져 있었다. 청담동 수제구두 숍 ‘수콤마보니’에서 산 구두로 가장 아끼는 것이다. 그 길로 다시 거리로 나가 1시간동안 플래시를 들고 헤맨 끝에 보도블록 사이에 낀 굽 밑부분을 찾아냈다.

‘더욱 아름다운 나’를 원하는 여자들의 마음은 단순한 ‘바람’을 넘어 ‘중독’으로까지 치닫는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에서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는 우울할 때마다 ‘지미 추’ 등의 명품 구두를 사 모은다. 집세를 못 내는 형편인데도.

그런가 하면 마돈나는 섹스보다 ‘마놀로 블라닉’ 구두가 더 좋다고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여성들은 캐리 브래드쇼나 마돈나를 닮았다. 여자들은 왜 구두에 빠지는가.

○ 슈어홀릭의 시대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 구두는 금강과 에스콰이어 엘칸토 등 대기업 제품밖에 없었다.

90년대에는 이대 앞, 명동 등지에서 주문 제작으로 시작된 이른바 ‘살롱화’ 붐이 일었다. 탠디 세라 미소페 엘리자벳 키사 등.

90년대 후반 명품이 대중화되면서 페라가모의 리본 모양 장식이 달린 바라 구두나 구치의 로퍼 등도 흔한 아이템이 됐고 작년부터는 ‘수콤마보니’를 시작으로 ‘최정인’ ‘더 슈’ 등 청담동 일대에 디자이너가 만든 수제 구두 숍들이 속속 들어섰다. 또 지미 추 등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여성들의 구두 중독은 다시 한 번 전기를 맞았다.

수콤마보니의 심연수 이사는 “손님 발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충고하면 ‘발에 피가 나도 신겠다’고 한다”며 “정말 구두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여성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슈어홀릭들은 구두를 먼저 사고 그에 어울리는 옷을 생각한다. 같은 디자인의 구두를 다른 색으로 2켤레 이상 사는 것은 기본. 한겨울에도 발가락이 보이는 오픈 토 슈즈를 신는다. 제주도 등 지방 고객들은 팩스로 그림을 보내 구두를 주문하기도 한다.

‘섹스&시티’의 주인공들이 ‘꿈의 구두’라고 격찬했던 지미 추를 수입, 판매하는 FnC 코오롱의 윤나리 과장은 “최근 패션의 중심이 구두로 이동해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 남자보다 좋은 구두

구두 디자이너 최정인씨는 “드라마(섹스&시티)의 영향 때문인지 구두 중독이 여성들 사이에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고 말한다.

구두는 ‘패션의 완성’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옷이 그저 그래도 구두를 잘 신으면 ‘패션을 잘 안다’ ‘감각 있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동화 속에서 신분 상승의 매개체가 됐던 ‘유리구두’에는 여성들의 욕망이 반영돼 있다. 좋은 구두는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구두의 ‘부활’은 요즘 진이 되살아나는 패션 경향과도 일치한다. 잘 차려입은 성장에는 구두가 수많은 액세서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청바지 같은 소박한 차림에는 멋진 구두 하나로 자신의 패션감각을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다.

또 현실에서 매일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지만 청바지를 입고도 화려한 하이힐만 신으면 ‘공주’가 된 것 같은 대리만족의 기쁨을 얻는다는 것. 그래서 옷은 입어야 폼이 나지만 구두는 놓고 보기만 해도 즐거워진다.

더구나 하이힐은 에로틱하다. 프로이트는 “발은 원초적인 성적 상징이며 구두는 여체를 상징한다”고 말했으며 미국의 작가 린다 손탁은 저서 ‘유혹, 아름답고 잔인한 본능’에서 하이힐을 신는 것은 섹스어필을 위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패션지 ‘바자’의 에디터 김경씨는 최근 펴낸 칼럼집 ‘뷰티풀 몬스터’에서 말한다.

“가장 에로틱한 신체 기관인 여자의 발을 지속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완벽한 구두를 발견하기란 멋진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쉽다. 잘 만든 여자의 구두는 조형미나 색으로 볼 때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인데 그런 섹시한 예술품이 여자의 몸 아래 깔린 발 씌우개에 불과하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나는 발에 잘 맞는 멋진 구두를 신고 있으면 다루기 힘든 근사한 남자와 예술품을 동시에 지배하는 듯한 관능에 휩싸인다.”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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