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⑤김일성은 소련군의 심사를 받았다

  • 입력 2004년 9월 12일 18시 34분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뒷날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이 사진을 변조했다. 뒤에 서 있는 소련군 지도부는 물론 김일성 가슴에 단 소련무공훈장까지 지워 버린 사진을 각종 기록에 게재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뒷날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이 사진을 변조했다. 뒤에 서 있는 소련군 지도부는 물론 김일성 가슴에 단 소련무공훈장까지 지워 버린 사진을 각종 기록에 게재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9일은 북한정권 수립 56주년. 관영 러시아방송은 8일 특집방송에서 남북분단과 6·25전쟁에 대한 오래된 논란을 정리하는 결정적 비화 하나를 전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낙점했고, 김일성이 반대하는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감행했다는 것이다(본보 10일자 A2면 보도). 광복 후 49년 동안이나 북한을 지배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한 김일성은 누구인가. 해방공간에서 우익은 ‘스탈린이 키워낸 소련점령군의 앞잡이’로 보았으나, 좌익은 ‘항일빨치산을 이끌어 온 민족적 영웅’으로 치켜세운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료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쫓아보자.》

●교회 다니기를 무척 싫어했던 ‘김성주’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로 1912년 4월 15일 평남 강서군 고평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친가나 외가 모두 기독교 집안이고 외가는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까지 해 김일성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그는 뒷날 회고록에서 교회에 다니기가 무척 싫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도 어릴 때의 거부감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싶다.

김일성은 일찍이 만주로 이주한 부모를 따라가 거기서 컸다. 그는 잠시 조선인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의 교장은 민족주의자 최동오였다. 최동오의 아들은 남한에서 육군소장 외무장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한 최덕신. 1986년 최덕신이 월북한 것도 “김일성이 은사의 아들을 박대하랴”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 막간에 김일성(가운데)이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오른쪽)와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소련 극동군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메클레르는 1945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김일성을 대중성 있는 정치지도자로 조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김일성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만주에서 세브란스의전 졸업증을 걸어놓고 의사노릇을 했다. 물론 김형직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기는커녕 입학한 적도 없다. 결국 학력을 위조한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 덕분에 수입은 넉넉했다. 김일성은 삼촌이 만주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운영한 것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기도 했다.

●‘보천보전투’ 보도로 이름이 알려지다

김일성은 이어 중국인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와 중국 습속에 익숙하게 됐다. 그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빨치산 운동에 참여한 것도 학창시절 경험이 바탕이 됐다.

김일성은 중학생 시절 지린(吉林)에서 목회하던 민족주의자 손정도 목사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회고록에 ‘손 목사를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손 목사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없이 울었다’고 쓸 정도였다. 남한에서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서독대사 등을 역임한 손원일이 손 목사의 큰아들이다.

김일성이 국내에 널리 이름을 알린 것은 25세 때. 1937년 6월 함남 혜산진 부근에 위치한 보천보의 면사무소 등을 습격한 ‘보천보전투’ 때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몇 차례에 걸쳐 호외를 발행해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그의 이름이 조선민중의 뇌리에 남게 됐다. 그 뒤에도 그는 몇몇 전투에서 승리해 일제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한때 그가 붙잡혀 사살됐다는 얘기까지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연해주에서 소련군에 구금된 김일성

1939년부터 일제 관동군이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자 김일성은 이듬해 10월 부하 5명을 데리고 연해주로 들어갔다. 이때 그는 부하였던 김정숙과 결혼했다. 연해주에 함께 간 이을설 전문섭 강위룡 이두익 등은 나중에 북한 군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소련 극동군은 김일성 일행을 구금했다. 코민테른의 허가 없이 소련에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운 좋게 풀려났다.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상관이자 코민테른 허가를 받고 먼저 소련에 들어온 저우바오중(周保中)이 신원을 보증했기 때문이다. 소련 극동군은 그들을 산하의 88국제여단에 편입시키고, 김일성을 1대대장으로 임명했다.

88국제여단은 정규경찰과 비밀경찰 및 국경수비대를 관할하던 내무인민위원부 산하여서 악명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 장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부여받았던 대위 계급은 군이 아니라 경찰 계급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실제로 내무인민위원부는 군을 관할하던 인민무력위원부와 똑같은 계급과 계급장을 썼다.

●러시아에 남아 있는 ‘김일성 심사기록’

이 무렵 소련은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맺어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소련군 산하 빨치산들의 항일투쟁엔 제동이 걸렸다. 김일성 일행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소일한 시기였다. 소련이 일본과의 중립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한 1945년 4월 이후에야 상황이 바뀌었다.

조선인 전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도 그들에게 참전을 명하지 않고 계속 연해주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따라서 부하들을 이끌고 대일전에 참전해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개선장군으로 귀국했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소련이 김일성을 찾은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뒤였다. 그해 8월 하순과 9월 초순 사이에 스탈린이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리예프스키 원수에게 “북조선을 소련의 뜻에 맞게 이끌 조선인 지도자를 추천해 보고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소련 극동군이 김일성 심사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 국방부에는 지금도 그 심사기록이 남아 있다.

●스탈린, 비공개리에 직접 김일성 면접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북조선으로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혁명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대답이오.”

심사기록에 나와 있는 소련 극동군 관계자와 김일성의 대화록이다. 심사 결과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추천했다. 추천서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에 대한 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음”이라는 평가가 붙어 있다. 추천서를 받은 베리야는 “좋다”고 평가한 뒤 다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의 번견(番犬)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투옥과 고문에 앞장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된 베리야는 이후에도 줄곧 김일성의 옹호자가 된다.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그리고리 메클레르 예비역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리야의 보고서를 읽은 직후 김일성을 비공개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을 했다. 이에 김일성이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예, 예”를 연발하자 스탈린은 흡족해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결코 개선한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88국제여단 1대대 부하들과 함께 소련 군함인 푸가초프호를 타고 추석 전날 귀국했다. 소련 극동군 산하 제25군이 평양에 주둔군 사령부를 개설한 1945년 8월 26일로부터 24일이 지난 9월 19일 원산에 도착한 것이다. 조선을 떠난 지 20년 8개월 만이었다.

김일성이 열차 편으로 평양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 그는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개선이 아니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스탈린의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돌아온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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