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평론가 한기호씨 ‘책 3권의 은혜’ 5000권으로 갚다

  • 입력 2004년 9월 12일 19시 12분


경기 고양시 화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만난 이혜화 교장과 한기호씨(왼쪽에서 세번째와 네번째). 한씨가 가져다 준 책들로 도서관 혁신에 착수했던 이 교장은 “(내가 한기호씨에게 준) 세 권의 책이 수천권으로 돌아왔다고 늘 자랑한다”고 말했다. 고양=신원건기자
경기 고양시 화수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만난 이혜화 교장과 한기호씨(왼쪽에서 세번째와 네번째). 한씨가 가져다 준 책들로 도서관 혁신에 착수했던 이 교장은 “(내가 한기호씨에게 준) 세 권의 책이 수천권으로 돌아왔다고 늘 자랑한다”고 말했다. 고양=신원건기자
경기 고양시 화수고등학교 도서관은 4층 건물의 2층 중앙에 있다. 이 학교 이혜화 교장(60)이 “도서관은 학교에서 가장 좋은 곳, 책 안 보는 아이들도 불러들이는 곳에 있어야 한다”면서 교장실과 교무실을 1층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냉난방 설비도 도서관에 가장 먼저 했다.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책을 열심히 읽는다. 2학년 복영웅군은 입학 후 모두 433권을 읽었다. 도서관 담당 이선희 교사는 “전교생(1100여명)이 1년간 1인당 약 16권의 책을 빌려본다”고 말했다.

학교 도서관이 탈바꿈하기 시작한 2000년부터 학생들의 독서열기도 차츰 높아졌다. 이 같은 변화는 이 교장의 제자였던 출판평론가 한기호씨(46)가 지난해까지 3년간 5000여권의 책을 기증함으로써 시작됐다. 한씨는 이 교장이 평택고 도서관 담당교사 시절 자신에게 베푼 정을 기억했다가 책으로 갚기 시작했다. 1976년 이 교장은 이 학교 문예반장이던 한씨가 억울하게 무기정학 징계를 받고 착잡해 하자 신경림 시집 ‘농무’와 김광섭 시집 ‘겨울 날’, 황순원의 소설 ‘탑’을 안겨줬다.

‘제대로 된 학교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 교장은 1999년 12월 화수고 교장으로 부임한 뒤 이 뜻을 펴기 위해 책을 기증해 달라고 여기저기에 호소했다. 하지만 “대학이나 잘 보내지” 하는 반응뿐이었다. 이듬해 정초 세배하러 갔다가 이 교장의 어려움을 들은 한씨는 책이 모이기만 하면 지프에 실어 보냈다. 한씨가 운영 중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로 대부분의 출판사가 매주 수백권의 신간을 보내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교장은 한씨의 도움으로 도서관의 모습을 갖춰가던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감격해서 잠이 안 왔어요. 사서 교사한테 ‘24시간 편의점 한다는 기분으로 일하라’고 당부했지요. 오후 9시까지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오게 하기 위해 컵라면과 사탕, 만화까지 쌓아뒀어요.”

라면 먹으러 도서관을 찾았던 학생들이 판타지와 무협소설을 읽다가 차츰 문학 고전과 인문역사서, 과학 도서로 독서취향이 바뀌어 갔다. 학부모들도 학교의 ‘책 사랑방’에서 토론회를 갖고 ‘꽃과 밥’이란 문집을 냈다. 소문을 듣고 교육청도 지원을 시작했다. 이 교장은 “대학 입학을 위해 도서관에 힘쓴 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진학률이 매우 높아진 건 사실이죠. 학생들은 ‘일단 책을 읽으니 수시모집 때 심층면접에 나가도 막히지 않더라’고 말합니다”고 전했다.

한씨는 이번주 딸이 다니는 서울 여의도여고에 2000여권의 책을 기증한다. 앞으로는 모교인 평택고에도 책을 보낼 예정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곁에 갖다 주면 아이들은 언젠가 읽게 마련입니다. 책을 읽으면 아이들은 변합니다. 이 선생님이 주셨던 책이 제게 위안을 주었던 것처럼 말이죠. 도서관에 대한 이 선생님의 열정이 아이들과 책이 어울리게 되는 하나의 모델이 됐으면 합니다.”

고양=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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