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의 폐해는 독서교육에서도 심각하다. 남보다 더 많이, 더 어려운 책을 ‘읽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학창시절의 독서를 고통스러운 의무로 만들어 버렸다. 과제 독서와 요약 독서가 판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갈수록 책에서 멀어지고 있다.
학생들에게 독서가 즐거운 활동이 되려면 책은 어떤 미덕을 갖춰야 할까? 일단은 쉽고 가벼워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동시에 깊이도 있어서 다양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연관된 다른 책을 또 읽고 싶은 욕구가 들게 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동화는 이런 요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장르다. 동화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로도, 심오한 상징으로도 읽힐 수 있다. 나아가 동화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활자의 매력에 빠지게 해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읽게 만든다.
‘그녀들의 메르헨’은 중고교생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책이다. 루이제 린저, 잉게보르크 바흐만 등 독일의 대표적 여성작가들이 쓴 이 책의 동화들은, 하나같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가슴을 때리는 이야기들이다.
바흐만의 ‘스핑크스의 미소’를 예로 들어 보자. 어느 날 어떤 왕국에 거대한 스핑크스가 나타나 왕을 위협한다. 세 가지 숙제를 풀지 못하면 왕국을 빼앗아 버리겠단다. 첫 번째 과제는 지구 속의 모습을 밝혀내는 것. 왕은 학자들을 총동원해 땅 속의 비밀을 모두 밝히고 위기를 넘긴다. 이어 스핑크스는 두 번째 과제를 던진다. 지구 주변과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라. 왕은 엄청난 연구를 통해 우주의 모든 별과 물질의 과거, 현재를 전부 드러낸다. 이어 제시된 세 번째 과제. “그대가 다스리는 인간들 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왕은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 마침내 왕은 극단적 결심을 한다. 인간의 내면을 밝힐 수 없으면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밝혀낼 비밀도 없을 테니까. 왕은 마침내 모든 백성을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스핑크스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핑크스는 답을 듣지도 않고 왕의 나라는 이제 자유라고 말하고 웃으며 떠난다. 그제야 왕은 자신의 왕국을 스스로 파멸시켰음을 깨닫는다.
이 짧은 동화는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오히려 인류의 생존 기반을 좀먹고 있는 현대문명을 성찰하게 할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과자로 만든 집’, ‘아름다운 금빛머리 아가씨’ 등 생각이 있는 동화들이 빼꼭히 담겨 있다. 즐거운 책 읽기 속에서 사색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동화의 장점을 잘 살린 책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학교 도서관 총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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