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뿌리읽기]<109>지체(遲滯)와 정체(停滯)

  • 입력 2004년 9월 30일 18시 47분


歸鄕(귀향)의 즐거움도 잠시, 歸京(귀경)길의 遲滯와 停滯는 가히 교통지옥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도시화와 근대화의 빠른 물살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遲滯와 停滯가 야기하는 ‘느림’은 짜증보다 오히려 미학에 가까워 보인다.

遲는 의미부인 착(쉬엄쉬엄 갈 착)과 소리부 겸 의미부인 犀로 구성되어, 무소가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그전 갑골문(왼쪽 그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업고 가는(척·척) 모습으로써 혼자 걸을 때보다 ‘더딘’ 모습을 그렸다. 금문에 들면서 척에 止(발 지)가 더해져 착이 되었고, 소전체에서 사람을 업은 모습이 무소(犀)로 대체되어 지금처럼 되었다. 이처럼 더디고 무거운 걸음에서 느릿느릿 한가로운 걸음으로 변한 遲의 자형에는 느리고 더딤에서 오는 짜증스러움은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갑골문과 금문에는 상부상조에서 오는 공동체의식의 즐거움이, 소전체에는 느림이 주는 한가로움이 스며 있다.

停滯의 停도 ‘느림’에 대한 짜증보다는 그 ‘느림’을 즐기는 인간(人·인)에게 더욱 초점이 맞추어졌다. 停은 의미부인 人과 소리부인 亭으로 구성되었다. 亭은 다시 의미부인 高(높을 고)와 소리부인 丁(넷째 천간 정)으로 이루어졌으며, 둘이 아래위로 합쳐지면서 高의 아랫부분이 생략되어 亭이 되었다.

따라서 亭은 높다랗게 지어진 건축물, 즉 정자가 원래 뜻이다. 정자는 좋은 경치를 감상하거나 길가는 사람이 쉬도록 만들어진 휴식공간이다. 정자는 사람이 쉬어 가도록 유혹하고 사람은 정자에 머물기 마련이기에 停에서의 亭은 단순한 소리부가 아니라 의미부도 겸한다.

滯는 의미부인 水(물 수)와 소리부인 帶로 구성되었다. 帶는 소전체(오른쪽 그림)에서 옆으로 길게 그려진 허리띠에다 술 같은 장식물이 아래로 늘어뜨려진 모습이다. 그래서 帶는 腰帶(요대·허리띠)가 원래 뜻이며 이로부터 긴 끈은 물론 기다랗고 넓적한 물체까지 지칭하게 되었는데 갈치를 중국어에서 ‘다이위(帶魚)’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띠처럼 넓고 길게(帶) 흐르는 강물(水)은 무엇에 막힌 듯 천천히 느리게 흐르기 마련이며 언뜻 보면 마치 정지해 있는 듯하다.

바쁜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들은 이 글자를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을 연상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흐르듯 흐르지 않는 물로부터 빠름과 느림 속의 시간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영삼 경성대 교수 ysh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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