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추석이라면 고속도로에 엉킨 자동차밖에는 선연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없군요. 지난주에 주신 편지를 읽고 서둘러 집 근처 서점으로 달려갔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 책의 명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갑자기 유명해진 책은 잘 읽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게다가 이론적 틀이 약한 반면 구체적 실례가 많은 저술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대학인의 병폐이기도 하고요. 약간 면식이 있는 서점 아저씨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분명히 찾는 책인지 다짐을 받더군요.
말씀대로 재미있었습니다. 태초에 화성인 남성이 금성인 여성을 발견하고 공격적 사랑에 성공하는 창세기는 역사적 진실일 듯합니다. 적어도 가부장제의 정착과정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사내를 지배하는 철학이 승리와 패배의 이원론이기에 나의 승리만이 관심사일 뿐, 상대의 패배에는 냉담하다는 주장은 수천 년 동안 전쟁으로 이어져 온 인류사를 관류하는 상식이었지요.
감정의 표현 대 사실의 전달, 공감 대 문제의 해결 등으로 대비한 여자와 남자의 일반적 속성을 ‘생활의 지혜’로 팔아먹는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2500년 전에 이미 그리스 비극의 원조라는 아이스킬로스가 ‘오레스테이아’에서 기록했던 이야기지요. 신화 속의 재판인데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는 혈족관계가 없다고 판결했어요. 어머니란 아버지의 정자 보관소에 불과하다는 이유였지요.
전쟁과 가부장제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정 작가와 내가 공감했듯이 춘향시절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열악하다는 것은. 그게 모두 역사적 사실이고, 엄연한 현실입니다. 남성에게 힘이 쏠려 있기 때문이지요. 경제력과 사회적 힘,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 말입니다.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자주 거론되는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무어라고 했나요. 재능이 셰익스피어에 뒤지지 않는 여성이라도 남성과 동등한 작가가 되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자기만의 방’과 ‘연 500파운드의 수입’이지요.
자율의 영역과 경제적 독립, 그것은 ‘여자’가 감히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습니다. 생존하는 영국의 최고 계관시인, 테드 휴스에게 버림받은 실비아 플라스가 울프처럼 자살로 마감한 것은 오직 개인적 비극일 뿐일까요?
마사 누스바움이라는 여성 철학자가 쓴 ‘사랑의 지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성의 미덕은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ethic of care)’라는 주제어를 제시했지요. 이를 받아 로빈 웨스트라는 법여성학자는 ‘경제적 남성, 문학적 여성’이라는 문구를 만들어 냈지요.
‘인간성’을 추구하는 문학은 여성적 미덕이 빛나는 광장, 문학을 통해 ‘합리’와 ‘효용’을 금과옥조 삼아 숫자로 인간을 재단하는 비정한 남성 윤리를 계도해야 세상이 바로 선다. 그런 주장입니다.
정 작가, 남녀는 다릅니다. 몸이 다르기에 정신도 다르기 쉽습니다. 울프도 남녀는 한 몸, 모든 인간에 내재한 양성을 개발해야 한다고 절규했지요. 그게 정답이고 당위지요.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당위에 못 미칩니다.
남녀는 평등하고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소우주를 간직한 유일무이한 개체’, 그것은 마치 헌법 문구처럼 왠지 공허한 당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당위를 성취하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정 작가도 당찬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처녀막을 무기로 힘과 돈의 세계에 편승하려는 젊은 여성의 얄팍한 지략에 경고장을 보내지 않았던가요?
정이현 작가, 어쩌자고 그 고되고 험난한 문학의 길에 나섰는지요? 새삼 김현의 유언이 어른거립니다. ‘소설은 왜 읽는가, 이 세상이 과연 살 만한 곳인가? 강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 읽는다.’
우리 문학에서 여성은 살 만한 자리에 서 있는가요? 상큼하게 빛나는 신세대 작가, 정이현의 당당한 소신을 듣고 싶습니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