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단절의 벽 넘어 공동체로 “살맛나는 우리동네”

  • 입력 2004년 10월 7일 16시 32분


트럼프월드 주민들에게 나이, 성별, 직업, 국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이곳은 단지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 가꾸기가 한창이다.
트럼프월드 주민들에게 나이, 성별, 직업, 국적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이곳은 단지 ‘동네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 가꾸기가 한창이다.
《10여년을 살아 온 아파트.

하지만 앞집에 누가 사는지 아직도 모른다.

가끔 이사 온 집에서 돌리는 떡만이 콘크리트 벽 너머에도 사람이 있다는 신호를 줄 뿐이다.

구조적으로는 ‘공동주택’이어도 실제로는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는 개인주의적 생활이 이뤄지는 곳이 아파트의 현주소다.

지난달 중순 열린 트럼프월드 주민 파티. 주민들은 파티 끝 무렵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합창하며 서로간의 우의를 다졌다. 이들은 친목뿐만 아니라 공동 취사, 공동 진료까지도 함께 이뤄나갈 계획이다.

하자보수, 환경 등의 이슈를 계기로 몇 년 전부터 곳곳에서 공동체 만들기 움직임이 있었지만, 고급 대형 아파트들은 예외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이웃사촌’들이 살고 있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 대우 트럼프월드.

최고층의 100평짜리 펜트하우스 3채를 비롯해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47∼64평형대 집들은 아무리 못해도 10억원을 호가한다. 한강변의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 홀로 솟아 있는 32층 건물의 차가운 외양만큼이나 사람들도 그럴 것만 같은 곳.

하지만 상상은 빗나갔다.

이곳 124가구의 주민들은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해 얼마 전부터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주상복합건물을 “우리 동네”라고 부르며 분주히 옆집을 오가고 이웃과 함께 할 일들을 도모하느라 바쁘다.

‘부자’들이 사는 철옹성에서 공동체 실험이 한창이다.

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차가운 아파트 생활에 온기

2일 오전 아파트 1층 취미실. 4∼6세의 어린이 5명이 귀를 쫑긋 세운 채 구연동화를 듣고 있다. 선생님은 이 아파트 주민인 안정현씨(60·여).

안씨는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의 주인공 철이, ‘마루치 아라치’의 마루치 역을 맡았던 베테랑 성우다. 전문가가 ‘라이브’로 들려주는 구연동화의 맛이 아이들을 휘어잡은 눈치다.

한 달에 두 번씩 열리는 이 모임은 안씨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한곳에 살면서도 마주칠 때마다 그냥 멀뚱멀뚱 지나치던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

안씨는 “아파트촌 아이들일수록 ‘학교친구’가 대부분인데 그런 아이들에게 ‘동네 친구’를 만들어 준 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던 아이들은 이제 윗집 형네, 아랫집 누나네로 스스럼없이 돌아다니며 논다.

서로 친해진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퇴근 후 귀가하는 가장을 붙잡아 인근 노래방으로 끌고 가는 일은 다반사. 며칠 전 생일을 맞은 한 가장은 이웃으로부터 케이크를 선물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이웃끼리 4가구가 작당(?)해 광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30대부터 60대까지 ‘이웃’이라는 것 외에는 친해질 계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여행을 다녀온 주부 이영희씨(54)는 “전에 살던 곳에서는 거의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라며 “너무 동네일에 몰두하다 보니 친구들이 ‘바람 피운다’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주민들이 한강 둔치까지 함께 뛰는 저녁 조깅도 늘 20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인기다.

주부 이은주씨(33)는 “함께 운동하니까 아무래도 혼자 할 때보다 재미있고 운동량이 더 많아졌다”며 “이제는 외국처럼 서로 얼굴만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됐다”고 말했다.

몇몇 주민은 추석 때 고향에 가지 못한 독신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전해주기도 했다. 이달 중순 공교롭게 아내들이 외국에 나가는 몇몇 집 남편들은 아침 식사를 이웃집에서 같이 할 계획이다. 골프가 취미인 한 주민은 함께 필드에 나갈 사람을 구하는 안내문을 아파트 안에 써 붙이기도 했다.

○ 작은 시작이 가져온 변화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소위 ‘성공한’ 사람들. 직업도 의사, 교수, 사장 등 낮춰 잡아도 중산층 이상이다. 게다가 주민 가운데 30%는 외국인들. 그런 이들이 어떻게 ‘이웃’이라는 이름 하나로 만나 어우러질 수 있었을까.

시작은 남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4월 입주가 시작된 뒤 어느 곳이나 그렇듯 입주자 대표를 뽑는 모임 등이 몇 차례 있었을 뿐이다. 건물 안의 헬스장, 엘리베이터 등을 오가며 아는 사람끼리 눈인사나 하던 평범한 곳.

그러던 어느 날, 주민회의 도중 누군가가 “한번 뭉칩시다!”하고 말을 툭 던졌다. 지나가는 말처럼 튀어나온 이 제안이 그렇게 큰 바람을 몰고 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모두들 고립된 섬처럼 살던 게 아쉬웠나 봐요. 단절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는데 계기가 없었던 거죠. 일단 분위기를 타니까 평소 알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모임이 만들어졌어요. 외국인들도 아주 적극적입니다.”

주민 대표 김광현 회장(52)의 말이다.

이곳에는 문화, 교육, 대외협력, 시설, 하자보수 등 10여개의 분과가 운영되고 있다. 주민들은 각자의 직업을 살려 공동체 활동에 참여한다. 구연동화를 해주는 성우 안씨뿐 아니라 김성환 동덕여대 경영학과 교수(54)는 주민모임의 회계 감사를, 곽성현 서울대 경영대 국제교류실장(59·여)은 외국인을 위한 번역을 맡았다.

얼마 전엔 대학교수를 초빙해 ‘좋은 공동체 만들기’ 강의를 들었고, 지난달 중순엔 주민 대다수인 300여명이 참여한 파티가 열렸다.

파티를 하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땐 그저 음식만 간단히 준비해 모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되나. 뜻을 같이 한 10여명의 사람들은 행사 진행과 관련한 회의를 위해 한 달여 동안 거의 매일같이 모여야 했다.

처음 파티 일정을 알리는 공고를 로비 게시판에 붙였을 때 자진해서 참가 의사를 밝혀온 사람은 불과 10여명. ‘주최측’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자”고 뜻을 모으고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안내문을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며 참가를 권유했다. 낮에 사람이 없는 집은 한밤중에 방문하기도 했다.

극성스럽기까지 한 이 같은 행동을 주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다.

‘왜 그렇게 설치고 다니느냐’, ‘(공동체라니) 그게 되겠느냐’, ‘처음이니까 하는 거지’….

곱지 않은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한번 뭉쳐보자’는 끈질긴 권유는 주민들 대다수가 참여해 자정을 넘겨서까지 열린 파티로 귀결됐다. 밤새 함께 놀아본 경험이 이후 공동체 활동의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이다. 이날 파티 막바지에 주민들은 결국 서로 어깨를 겯고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

“우리∼만남은∼우연이∼아니야∼.”

이날 파티에 참석했던 미국인 주민 리처드 호그는 “대부분의 한국 아파트에서 외국인은 한동네 사람 취급을 받기가 어려웠다”며 “무심코 갔던 파티에서 인사를 나누고 친해진 이웃들과 이제는 함께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 나 아닌, 우리로

공동체가 움트고 있다고 해도 주민간의 마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취미실, 독서실, 헬스장, 실내골프연습장, 공용 테라스 등 공용 공간을 개인 영리만울 유ㅏ햐 사용하거나 자기 집 물건처럼 쓰는 사람들과 자잘한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서로간의 어색함과 무관심은 여전히 존재한다. 부족한 시간, 주민간의 의식 차이, 잦은 이사 등 앞으로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이제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완벽함을 바라는 건 무리죠. 하지만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문화에서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갔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나아가면 언젠가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이 되겠죠.”(김 회장)

이들의 꿈은 ‘그들만의 리그’를 뛰어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 이달부터는 용산 민자역사에서 안내와 청소, 통역 등의 자원봉사를 시작한다. 인근 보육원, 양로원에 도시락을 전달하는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이영희 커뮤니티 팀장(54)은 “돈과 성공으로 집약되는 부자동네는 있어도 정말 좋은 의미의 모범적인 부자동네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이웃,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중장기 과제 중 역점 사업은 ‘공동 취사’를 실현하는 것. 건물 내 공용 공간에 함께 밥을 먹는 자리를 만들면 어우러짐이 일상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김 회장은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앞집을 놔두고 관리실이나 경찰서에 연락을 하는 게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모습”이라며 “우연하게 이웃이 되었지만 서로 알아가며 ‘함께 살아가기’의 의미를 다시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글=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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