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혜초일기’… 詩로 되살아난 혜초

  • 입력 2004년 10월 8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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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일기/박진숙 지음/159쪽 6000원 문학세계사

삶을 좀 더 풍요롭게 읽어 내기 위해 종교를 끌어오는 시가 있는가 하면, 삶의 바닥에서 종교적 섭리와 한통속으로 녹아드는 시가 있다. 구원을 위해 종교적 교리에 기대는 시가 있는가 하면, 견디기 위해 종교적 고행을 자청하는 시가 있다. 시집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불교적 언어와 상상력을 빌려 입은 이 신작 시집은 후자 편에 좀 더 기울어 있다.

‘혜초일기’ 시편들에는 여러 겹의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다. 혜초의 일생과 혜초의 인도 순례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법구경이나 유마경 같은 불교의 경전과 그 가르침이, 그리고 시인의 인도 체험과 상상으로 직조된 천축의 구전문학이 표층의 겹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겹겹의 의미 맥락들은 메타적이고 상호텍스트적인 독서의 즐거움을 유도하는 ‘애피타이저’이지,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한 ‘메인 코스’는 아니다. 이를테면 ‘혜초일기 14 구시나가라의 열반상’처럼, 편마다 같은 형식으로 붙은 부제들이 특히 ‘애피타이저’ 기능을 돋우고 있다. 이 부제들을 빼고서도, 아니 오히려 부제들을 빼고 읽었을 때, 그의 시는 더욱 웅숭 깊게 울리기도 한다.

신라 승려 혜초의 눈과 마음을 빌리고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시인을 비롯해 범속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의 삶과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부처나 혜초나 천축의 이방인들이나 시인의 삶이 서로 중첩되며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언젠가는/등에 지고 가는 이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겠어요”라고 말할 때 ‘이 경전’이 불교의 경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 경전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서 ‘피가 우는 인연’과 ‘되풀이되는 윤회’로 얽힌, ‘커다랗고 따스한 어머니 뱃속’과도 같은 천축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초일기’는 천축으로 비유되는 이 사바의 한가운데서 삶의 근원과 진리를 자문자답하고 있는 상상의 순례기이기도 하다. 오천축국에서 혜초가 절절이 그리워했던 고향처럼, 인연과 밥과 병과 죽음으로 이어진 시인이 쓴 이 순례기의 출발과 회귀의 한가운데는 ‘어머니’가 있다. 그 어머니를 여성화된, 법륜이라 공(空)이라 보살이라 부처라 한들 안 될 것도 없을 것이다.

천축에 가고 싶다, 혜초가 걸었던 천축의 길을 따라. 시인이 옮겨 쓴 이 삶의 경전에 기대어. 그러나 아뿔싸! 나는, 당신은, 이미 천축의 한가운데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가야 하니까, 가는 길밖에는 없으니까 우리는/뚜벅 뚜벅/오오, 그래 그래, 뚜벅 뚜벅/네 눈에 가득 고인 천축의 빈 하늘/내 눈에 텅 빈 천축의 꽉 찬 하늘/그렇게 한곳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진에 정진을 더해 용맹정진하며….

정끝별 시인·명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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