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6>卷四. 흙먼지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10일 18시 14분


한왕 유방의 허락이 떨어지자 위무지는 곧 진평을 불러들였다. 그때 진평을 한왕의 유막(유幕)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은 중연(中涓)인 석분(石奮)이었다. 나중에 다섯 부자(父子)의 녹봉이 합쳐 만석이 되었다 해서 만석군(萬石君)으로 불린 석분은 때마침 산동(山東)에서 도망쳐 온 다른 여섯 사람도 함께 데리고 왔다.

진평을 비롯한 그들 일곱이 한꺼번에 유막 안으로 들어서자 한왕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너희들 중 누가 진평인가?”

“제가 진평입니다.”

진평이 한 발 나와 길게 읍하며 대답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왕이 문득 알 수 없다는 눈길이 되어 물었다.

“그대가 진평인가? 그런데 몹시 낯이 익구나.”

그러나 진평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군왕을 만나보는 예를 올릴 뿐 한왕의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왕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불쑥 말했다.

“이제 알겠다. 그대는 지난해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몸을 빼내는 나를 눈감아 준 항왕의 객경(客卿)이 아닌가?”

“대왕께서 기억하시니 바로 아룁니다. 실은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진평이 그렇게 대답했으나 얼굴에는 자랑하거나 내세우기는커녕 어딘가 민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게 이상한지 한왕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때 그대가 과인이 패상(覇上)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으려 들었다면 과인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범증(范增) 늙은이의 독한 손에서 끝내 빠져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때 그대는 과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이렇게 과인을 찾아오면서 먼저 그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홍문에서의 일이 새삼 고마운지 그렇게 묻는 한왕은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진평은 한층 민망스러워하는 낯빛이었다. 오히려 죄지은 사람처럼 한참이나 깊이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 처연하게 말했다.

“송구스러우나 그때 저는 패왕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대왕께서 무사히 몸을 빼내시면 제 주인 되는 패왕께 크게 해로우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 떠나시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니, 이는 제 주인 되는 패왕께 불충한 짓을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되실 분으로서, 비록 대왕을 다소 도운 공이 있다 해도 제 주인을 저버린 자를 높이 세워서는 결코 아니됩니다. 더군다나 대왕은 하늘이 돌보는 분이시니, 그날 제가 그곳에 없었더라도 터럭 하나 상함이 없이 패상의 진채로 돌아가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이 잠시 말을 잃고 진평을 바라보았다. 자칫 모든 일에 성의 없고 소홀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너그럽고 대범한 한왕이었으나, 그런 진평의 말에는 무언가 한왕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다시 한차례 깊이 고개를 끄덕인 한왕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진평의 말을 받았다.

“하나 그대는 이제 그 주인을 떠났으니, 새삼 그대에게 그때의 불충을 물을 수는 없구나.”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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