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에 처음 오시는 분들은 이런 표지판을 보고 놀라실 겁니다. 사람이나 차량의 통행보다 말이 먼저라는 얘기거든요. 35만평 규모의 드넓은 서울경마공원은 이처럼 말이 주인이죠.
이곳에는 1400마리 정도의 말이 있습니다. 한국마사회의 지난해 매출액이 약 5조6000억원이었다고 하니 한 마리가 1년에 평균 40억원을 벌어들인 셈이네요.
경마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이 있는데 다 옛날 얘깁니다. 지난해 약 1632만명이 이곳 서울경마공원을 찾았거든요.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은 관중이 272만명이라고 하니 경마의 위상을 아시겠죠? 경마는 이젠 몇몇 ‘꾼’들이 하는 도박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는 경기로 자리를 잡았다 이겁니다.
아차차, 잠깐 흥분해서 제 소개가 늦었네요. 인사드립니다. 올해 세 살인 경주마고요, 여기 살아요. 이름은…, 다음에 알려드릴게요. ^ ^
○ 말: 하루 식사량 10kg… 시속 60km로 달려
윤기 흐르는 갈색 털과 잘 빠진 제 몸매, 제가 봐도 감탄할 만해요. 키 170cm, 몸길이 2m. 몸무게는 잴 때마다 달라지는데 450kg쯤 되나 봐요. 경주에 나가서 한 번 뛰고 오면 8kg이 줄고 글쎄 오줌만 눠도 2∼3kg은 빠지니 말 다했죠. 하루에 먹는 밥이 10kg, 물이 30L나 된답니다.
저는 서러브레드라는 종입니다. 서울경마공원에 있는 제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종이지요. 서러브레드는 멀리 영국에서 귀족들이 요크셔 지방의 재래종 암말과 아랍계 수말을 교배해 만들었다고 해요.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만들어졌죠. 우리 서러브레드들은 보통 시속 60km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어서 1000∼2000m밖에 안 되는 경주는 1, 2분이면 끝나버리죠.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경주마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왔다고 해요. 하지만 지금은 열에 일곱은 한국에서 태어난 말이에요. 제 고향은 제주도인데 그곳엔 약 70여개의 목장이 있어서 저 같은 경주마들이 태어나죠. 아직은 외국 말들의 달리기 솜씨가 한 수 위지만 한국 말들도 열심히 훈련을 해서 조금씩 빨라지고 있어요.
우리는 25∼30살까지밖에 못 살아요. 경주마로 뛸 수 있는 건 그보다 훨씬 짧죠. 4∼6살이 전성기고 7살이 넘으면 한 물 간 취급을 받거든요.
우리 말들도 현역일 때 잘 뛰어야 여생이 편해요. 그래야 후손을 낳기 위한 씨말이 되거든요. 씨말이 되면 밥 먹고 매일, 으흐흐. *^^*
씨말은 10마리 가운데 채 한 마리도 안 되고 나머지는 승마장이나 유원지로 가거나 더러 말고기로 팔려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 사람: 조교사가 몸관리… 호흡 맞추고 전략 짜
경마는 말과 사람이 호흡을 맞추는 경기랍니다. 이번엔 저희 조교사 선생님과 주인님을 소개해 드릴게요. 조교사는 평소에 저희를 관리하고 훈련을 시켜주세요. 경기에 출전할 때는 전략을 짜는 역할을 하시죠. 운동 경기의 감독 같은 분이죠.
말을 갖고 있는 분들은 별로 노출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프로야구에서 선수나 감독에 비해 구단주가 부각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처럼.
영국의 처칠이란 사람이 “총리보다 더비에 출전하는 말의 마주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는데 경주마를 가진 마주들이 어깨가 으쓱할 만하죠. 더비는 세 살짜리 말이 출전하는 영국 최고의 경마대회랍니다.
영국이나 중동 같은 곳에서 말을 소유하는 것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죠. 주변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이 동네 주인님들도 대단한 분이 많아요. 박용오 두산, 이웅열 코오롱 회장, 변웅전, 지대섭, 신영균 전 의원, 우근민 전 제주지사, 영화배우 김지미, 김희라, 탤런트 김영철…, 이런 분들이죠.
돈이나 지위만으로 저희 정식 마주가 되는 건 아니에요. 마사회 마주등록심의위원회라는 게 있는데 이곳의 심의를 거쳐야 하죠. 1인당 가질 수 있는 말도 최대 10마리로 제한되죠.
○ 비즈니스: 2500만원에 사서 50배 이상 벌기도
옆방에 있는 제 친구는 저랑 동갑인 ‘무패강자’라는 녀석이에요. 요즘 이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놈이죠. 지난해 7월 처음 경주에 나왔는데 지금까지 9번 출전해 8번 우승했어요. 우와! 올해 들어 스포츠투데이배, 코리안 더비, 한국마사회장배에서 연속으로 우승했다고 아주 우쭐해 있어요. ‘무슨무슨 배’라고 붙은 경기들을 대상경주라고 하는데 일년에 25번만 열리고 상금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해요. 거기서 3번 연속 우승했으니 대단하죠.
‘무패강자’가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5억원쯤 된다고 하더군요. 작년에 녀석이 팔려올 때 6000만원 정도의 몸값을 줬다고 들었는데…. 주인님이 싱글벙글하시네요.
현역 가운데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8세 ‘새강자’ 형님은 지금까지 14억5000만원 정도 상금을 벌었다고 해요. 형님이 처음 팔려올 땐 2500만원이었다는데 50배 이상을 해낸 건가요. ‘무패강자’나 ‘새강자’ 형님 정도 되면 은퇴해서 씨말로 갈 때도 보통 10억원이 넘는 몸값을 받는답니다. 웬만한 프로선수 뺨치죠?
한두 살 때 이뤄지는 경매에서 평범한 경주마는 2000만∼3000만원에 낙찰되는 게 보통이에요. 저도 들은 얘긴데 경주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버는 돈은 1년에 평균 6300만원 정도라고 하더군요.
흠, 천고마비니 해서 가을엔 말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다는데 저도 더 열심히 뛰어야겠어요. 이번 주말엔 제가 뛰는 걸 보러 오시면 어떨까요?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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