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여류문학&비누냄새

  • 입력 2004년 10월 15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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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정이현 작가님, 지난 편지 잘 읽었습니다.

여성작가의 글쓰기 좌우명, ‘여성 개인의 삶의 문제를 사회구조의 문제와 연결시켜 바라보고 싶다’는 정 작가의 말. 응당 그래야지요. 그러나 내 말은 ‘여성적인 글쓰기를 밀고나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정 작가가 늘 강조하듯이 남녀의 차이를 극복하는 보편적 호소력을 갖춘 작품이라야 대작이 되지요.

우리 문학사에 ‘여류문학’이라는 어휘가 있었지요. 몹시 차별적인 분류였습니다. 여류문학의 상징어 중 하나가 ‘비누냄새’가 아닐까 싶군요. ‘그에게서는 항상 비누냄새가 난다’로 시작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1970년)는 한 시절을 희롱했지요. 이 소설의 핵심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법적으로 남매 사이인 사춘기 남녀의 애정을 담은 신파적 구성에 있지 않고 전편을 흐르는 ‘반산문적 감흥’에 있다는 평론가 권영민의 말이 있었지요. 내 느낌으로는 참을 수 없는 여류문학의 가벼움에 대한 아쉬움으로 들렸습니다.

역사의 격랑이 거세었던 이 땅에서 제대로 된 문학은 사내만이 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지요. 청소년 시절 나의 책읽기는 ‘사랑과 사상의 거리재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내들끼리만 나누어 가진 (정통)문학의 직분은 사회전체의 축약도를 그려내면서 세상살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지요.

그것을 ‘사상’이라고 말해 둘까요. 반면 여류문학은 계절의 변화나 일상의 작은 즐거움과 슬픔을 거머잡고 만년필을 놀리는 것으로 족했지요. 전쟁과 혁명이라는 한계상황이 남성만이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위대한 문학’의 모태가 되었고, 바깥 세계에서 쌓은 체험과 사상의 무게에 지친 사내의 땀을 비누로 씻어주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는 여류문학의 주된 임무였지요. 적어도 박경리와 박완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말입니다.

‘여류’라는 단어에는 도회성이 전제되어 있었지요. 정확한 표준말, 세련된 용모, 그리고 음악 미술 등 서양문화에 대한 약간의 교양이 필수였지요. 도회성의 치명적 약점은 땅 냄새, 땀 냄새와 격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강신재가 ‘임진강의 민들레’(1962년)에서 그렸듯이, 서울이란 곳은 해방군으로 점령한 인민군 여전사도 약탈한 코티 분으로 분장하는 곳이었지요. 흙에 뿌리박지 못한 삶은 아무리 강렬한 율동의 연속이었더라도 그저 구름 위에 남긴 한 줄기 궤적일 뿐이지요.

정 작가께서는 그래도 행복한 시대에 문학의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문학이 철저한 남성 지배 아래 신음하던 그 잔혹의 시대가 물러갔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책임도 무겁습니다. 봇물 터지듯이 밀어닥친 이 시대의 여성문학에서 나는 강한 샴푸냄새를 느낍니다. 신선한 외모, 박진감 있는 문장 속에 인공의 샴푸냄새가 물씬거립니다.

내게 그 냄새는 30년 전에 맞닥뜨린 당혹스러운 비누냄새와 진배없습니다. 문자 대신 영상으로 승부를 거는 세태입니다. 어쩔 수 없이 문학도 영상에 끌려 들어가는 듯합니다. 문학의 본령이던 말의 역할을 고집하는 여성작가가 적은 듯합니다. 내 아쉬움이 물러나는 세대의 향수 어린 푸념에 그쳤으면 합니다. 풍성한 가을이 되세요.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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