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은 1910년대 무단통치기, 1920년대 문화통치기, 1930년대 이후 민족말살정책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이 중 문화통치기는 일제가 언론출판 및 결사를 허용한 시기로 동아일보의 담론투쟁은 주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담론투쟁은 무엇인가. 담론(discourse)은 전문적인 형태의 토론 또는 논쟁을 말하는 철학적 용어로 담론투쟁은 민족운동의 한 카테고리에 속한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노선은 크게 담론투쟁과 무장투쟁으로 나눌 수 있다. 담론투쟁은 실력양성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의 담론 실천 행위를 통한 장기적 대응 방식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정체성 회복을 추구했다. 이에 비해 무장투쟁은 의병활동, 저격 등 폭력을 통해 일제의 정책에 즉각 대응하는 것으로 주로 영토 회복을 겨냥했다. 투쟁방식은 다르지만 독립이라는 목적은 같았다. 따라서 담론투쟁이 무력투쟁보다 열등한 투쟁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담론투쟁을 이끈 민족언론 활동의 가장 큰 의의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데 있다.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문화주의를 제창한다는 요지의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 사설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는 3·1운동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민족운동의 르네상스기를 잘 보여 주는 예다.
동아일보의 담론투쟁은 △식민지배 정책과 행정을 비판한 정치 분야 △아시아동맹론 등 일본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국제 분야 △물산장려운동을 주장한 경제 분야 △가부장제와 혼인제를 비판한 사회 분야 △민립 대학 설립과 민중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주장한 교육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졌다.
동아일보가 펼친 담론투쟁은 일제하 민족정체성 발전에 기여했고 일제 지배의 야만성을 고발했다는 점에서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독립 추구라는 일관된 논조를 유지했다. 특히 일본의 동화정책이 현실적으로는 조선 사람이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차별을 행하는 정책이라는 점을 사설을 통해 예리하게 비판했다. 1924년 봄에는 15번이나 사설이 삭제된 채 발간됐으며 총독부는 친일 인사를 시켜 당시 사장 송진우를 납치해 구타하기도 했다.
이러한 담론투쟁은 광복 후 근대화와 민족주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김용직 교수는: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45)는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3·1운동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한국학 강의 파견 교수, 한국정치학회 이사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근현대정치론’(1999년·풀빛),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공저·2004년·백산서당) 등이 있다. 주요 논문에는 ‘사회운동으로 본 3·1운동’, ‘구미 신사회운동의 특성: 집합행동론적 시각’ 등이 있다.
▼서울 언남고 교사-학생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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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강연을 들은 뒤 서울 언남고 권종원 교사(39)와 이 학교 3학년 김재근군(18)이 즉석 토론을 벌였다.
김군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언론이 담론투쟁이라는 방식으로 민족운동을 했다는 점을 그동안 잘 몰랐다”며 “동아일보가 반일 투쟁을 그렇게 치열하게 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군은 담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어려워 처음에 이해하는 데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권 교사는 “담론투쟁은 실력양성운동 등 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는 문화적, 정신적 운동을 포괄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김군이 “저는 그래도 담론투쟁보다는 무장투쟁을 선호한다”고 말하자 권 교사는 “그 시대에는 담론투쟁만으로도 의미가 컸다”며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은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권 교사는 “교수님 말씀 중 역사는 시기별로 나눠서 봐야 한다는 지적은 역사 공부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스승과 제자는 입시에 밀려 천대 받는 역사공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군은 “많은 친구들이 역사를 깊이 공부하지 않으려 한다”며 “역사의식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 교사는 “점수 잘 받으려고 역사를 배우는 학생이 많은 요즘 토요 역사강좌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군은 “교과서에 없는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어 좋지만 강의 진행이 빨라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며 “다음 주부터는 강사가 추천하는 책을 읽고 좀 더 공부를 한 뒤에 와서 강의를 들어야겠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김군은 12월 18일 마지막 12강까지 다 들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소년등 250여명 수강열기 反日-韓日 문제 질문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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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열린 ‘청소년 역사강좌’의 제3강에는 청소년 등 25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강의 후 질의 응답시간에 김민석군(고양외국어고 3년)은 “동아일보가 반일(反日)을 했다고 하셨는데 동아일보가 친일(親日)했다는 KBS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강사인 김용직 교수는 “역사 연구는 시기 구분이 중요하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에는 반일에 충실했다. 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은 황국신민화와 창씨개명으로 대표되는 야만적 형태의 강압적 지배였고, 지도층 인사들은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협박을 당했다. 요즘 역사를 다시 세운다고들 하는데 역사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친일과 반일에 관해서는 교과서적인 모범사례를 찾아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활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는 있어도 한 개인을 놓고 잘못만 했다고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생들을 평가할 때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종합해서 평가하지 않느냐. 항상 잘할 수는 없으며 잘한 부분과 잘못한 부분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순성군(잠실고 2년)은 “‘문화통치기’는 일본이 붙인 명칭인데 그 이름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김 교수는 “일본인이 붙인 명칭이라 보통 따옴표를 붙여 인용한다. 기록을 위해 쓰는 명칭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35년 중 다른 시기에 비해 통제와 감시가 적은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답했다.
안지은양(신명여고 2년)은 “다른 민족언론은 언급하지 않고 동아일보만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당시 동아일보는 민족언론의 담론 투쟁을 이끈 맏형과도 같은 존재였다”며 “구독자도 많았고 남아 있는 자료도 많기 때문에 주로 연구했다”고 답했다.
질의응답이 끝난 후 윤정경씨(68)는 10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1시간 가까이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윤씨는 “동아일보는 폐간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것일 뿐”이라며 “일부 방송은 오히려 일본의 만행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이번 주 토요 역사강좌 안내(제4강)▼
▽일시=23일 오후 3∼4시반
▽장소=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
▽주제 및 강사=‘일제시대 한반도 국제관계’(구대열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
▼제4강의 이해를 돕는 책▼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1-일제시기 한반도의 국제관계(구대열 지음·역사비평사·1995년)
△한국 국제관계사 연구2-해방과 분단(구대열 지음·역사비평사·1995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환경(한상도 지음·한울·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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