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계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실었던 같은 제목의 단편을 고쳐 쓴 이 작품은 첫사랑과의 반세기에 걸친 사연을 술회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룬다. 박씨가 새 단행본 작품을 펴낸 것은 2000년 장편 ‘아주 오래된 농담’ 이후 4년 만이다.
가을 햇살이 따가운 20일, 경기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 자락에 있는 박씨의 집을 찾았다. 마침 잔디마당에는 꽃들이 다투어 핀 ‘그 남자네 집’의 화단처럼 백일홍과 맨드라미, 과꽃 등이 한창이었다. 박씨는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서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 간 후배가 있어 3년 전쯤 그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며 “워낙 세월이 많이 흘러 우리 옛집 터는 찾을 수 없었지만 ‘그 남자네 집’이 있던 자리는 알아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에 나오는 ‘나’ 역시 작가처럼 돈암동을 방문해 홍예문이 높은 기와집인 ‘그 남자네 집’이 있던 곳을 찾아본다. ‘현보’라 불리는 ‘그 남자’는, 소설 속의 ‘나’가 6·25전쟁 후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서울대를 중퇴하고 미군부대에 일하러 다니던 시절 우연히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낀 먼 친척이다.
군복이 잘 어울리고,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유장하게 외우며, 유머가 흐르는 축구선수였다. 그러나 막내다운 투정이 남아 있고 전쟁 때 당한 부상으로 선수로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된 쓸쓸함이 묻어나던 남자였다.
박씨는 “현보라는 인물의 모델이 있긴 하다”면서도 “이 글에 자전성이 있다고 말할 이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소설에는 사랑의 열정에 대한 묘사가 살아있다. 그러나 순애보 같은 감정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가 내레이터로 나와 간간이 ‘사랑에 대한 매우 현실적이고도 솔직한 진단’을 하고 있다. 가령 ‘플라토닉(한 사랑)은 임신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것)’라는 대목이나, ‘사랑은 도덕적이든, 부도덕하든 다 벌레들의 짓’이라는 체념적인 독백, 약혼자가 슬며시 손을 잡자 “넌 이제 내 손아귀에 있어”하고 되뇌는 ‘나’의 속마음에 대한 묘사 등이 그렇다. 소설에는 생계를 위해 ‘미군의 여자’가 되는 춘희, 자존심 강하지만 식솔들을 책임지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는 ‘나’의 어머니, ‘그 남자’의 어머니 등 주변인물들이 박씨 특유의 묘사력에 힘입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박씨는 “연애 이야기와는 별개로 전쟁 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기태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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