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주홍글씨’…충격적인 21세기판 창세기 3장

  • 입력 2004년 10월 20일 18시 40분


자기 파멸적인 욕망과 본성을 적나라하게 담으며 인간 원형질에 원색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영화 ‘주홍글씨’. 극중 기훈이 정부 가희의 발톱을 깎아주고 있다. -사진제공 LJ필름
자기 파멸적인 욕망과 본성을 적나라하게 담으며 인간 원형질에 원색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영화 ‘주홍글씨’. 극중 기훈이 정부 가희의 발톱을 깎아주고 있다. -사진제공 LJ필름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성경의 창세기 3장6절. 영화 ‘주홍글씨’는 이 자막으로 시작된다.

1991년 단편 ‘호모 비디오쿠스’, 2000년 장편 데뷔작 ‘인터뷰’로 한국 영화계 기대주가 된 변혁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영화를 필체에 비유하자면 이 작품은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변 감독만의 ‘글씨’다. 대담한 주제, 강렬한 표현, 독창적인 스타일이 돋보인다.

이지적이면서도 동물적인 감성을 지닌 강력계 형사반장 기훈(한석규). 그에게는 순종적인 아내 수현(엄지원)과 열정적인 정부(情婦) 가희(이은주)가 있다. 기훈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여고 동창생인 두 여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기훈은 어느 날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에서 남편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경희(성현아)를 만난다.

‘주홍글씨’는 ‘21세기 판 창세기 3장’이다. 미스터리와 멜로의 외피가 작품을 감싸고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 영화는 도입부에 등장하는 기훈의 고백 그대로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거부할 수 없었고, 나중에는 치명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다뤘다. 근래 개봉된 한국 영화 가운데 인간 원형질에 가장 적나라하게 접근한 작품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 극한으로 치닫는 표현방식 등에서 영화는 ‘올드 보이’와 닮았지만 그 농도는 더욱 짙다. ‘올드 보이’가 주제의 강렬함을 화면 테크닉을 통해 중화시킨 반면 ‘주홍글씨’는 이미지의 덧칠을 통해 오히려 충격의 강도를 높였다.

영화 속의 ‘아담’, 기훈은 ‘나쁜 남자’다. 그는 가희와 수현 가운데 한 여인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을 꾸린 상태에서도 나머지 여인과 관계를 계속 가짐으로써 두 여인 모두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훈이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이 빙산의 일각이라면? 영화는 그를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이중적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차 트렁크에 갇힌 아담(기훈)과 이브(가희)에게 맞춰진 라스트 20분. 한국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 강렬한 신의 하나로 기억될 이 장면은 욕망을 선택한 죄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인간의 실체를 보여준다. 트렁크 신과 함께 교차 편집되는 화면의 두 붉은 색은 사뭇 다르다. 전자는 피로 상징되는 죽음에 가까운 절망, 뒤의 붉은 배경은 또 다른 진실이 묻어 있는 관능으로 그려진다.

카메라의 시선과 음악은 이브에게 속삭이던 뱀의 혀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콤하다. ‘박하사탕’ ‘파이란’ ‘오아시스’의 음악을 맡았던 이재진과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에게서 본격적인 지휘 수업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갖춘 변 감독의 궁합 때문이다. 실제 변 감독은 극중 지휘자로 출연하기도 한다.

지난해 ‘이중간첩’의 흥행 실패 뒤 복귀한 한석규는 때로 ‘초록물고기’ ‘넘버 3’의 밑바닥 인생 이미지가 겹쳐져 아쉬웠지만 다중적인 캐릭터를 힘 있게 소화해냈다. 살인 현장을 찾는 기훈이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의 아리아 ‘파체 파체 미오 디오’(Pace Pace Mio Dio·주여 평화를 주소서)를 부르면서 거친 욕을 내뱉는 모습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연기다.

이은주는 비운의 이브였다. ‘탐욕적’ 섹스와 ‘절망적’ 섹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여배우는 흔치 않다. 29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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