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우룡]권력을 비판하면 반역인가

  • 입력 2004년 10월 21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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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문은 수난과 저항의 역사 한가운데 언제나 서 있었다. 일제 치하와 자유당 정권, 그리고 4·19와 5·16을 지나면서 반독재 민주화의 최전선에서 국민과 함께 호흡해 왔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몰고 간 한국 언론의 용기와 의지는 아마도 세계 신문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언론은 자유인권의 투사요, 필봉은 총탄보다 강하다는 것을 실증했다.” 한 원로 언론인의 우리 신문에 대한 평가였다.

▼李총리의 위험한 언론관▼

우리 신문은 역대정권의 ‘이성 잃은’ 언론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것은 언론의 사명이다. 언론은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 받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신문이 권력에 봉사할 때 사람들은 이를 ‘주구(走狗)’라고 부른다.

언론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또 언론은 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언론은 보도하고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나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더 타임스’가 곧 영국이라면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상징이다. 그 긴 역사에 왜 굴절과 파행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동아는 일제와 자유당 정부, 유신과 군사정권 동안 줄곧 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문화주의를 제창해 왔다.

유럽을 순방 중이던 이해찬 국무총리는 이렇듯 한국을 대표하는 비판신문에 대해 여과 없는 폭언을 토해내 많은 국민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역사의 반역자다”라고 잘라 말했다. 압제와 폭정에 맞서 기사삭제, 압수처분, 정간과 폐간을 밥 먹듯 당했던 ‘권력의 감시자’가 어떻게 해서 반역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조선, 동아는 내 손아귀에서 논다”는 호언은 또 뭐란 말인가. 신문이 무슨 정부의 하부구조인가.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항상 정치권력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발행 부수가 많았고 누구보다 정부비판에 앞장섰던 동아는 권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억압과 수난을 받지 않았던가. “끝까지 철저하게 싸울 것”이라는 그의 ‘결의’ 또한 섬뜩하다. 노무현 정부의 공적1호가 동아, 조선이란 말인가. 경제회생, 북핵문제, 부패척결, 국민통합 등 산적한 현안은 모두 팽개치고 언론 공격에 집중하는 그의 감정적 태도에 국민은 절망한다.

저널은 역사이고 저널리스트는 역사의 기록자이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우리 언론도 10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동아는 오로지 진실의 발견과 그것의 전파에 최선을 다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감시하고,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이다. 비록 정부정책에 반하더라도 언론은 올바른 여론을 반영해야 한다. 비판과 반대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이 아니던가. 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국민이 낸 세금은 올바르게 쓰이는지 누가 감시한단 말인가. 국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언론뿐이다.

▼신문은 영원한 ‘야당’이어야▼

나를 따르지 않고,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몰아세우는 태도가 오히려 반역사적이고 반개혁적이다. 총리는 “영원한 야당에 머물 것”이라고 동아, 조선에 ‘악담’을 퍼부었는데, 도대체 신문에 무슨 야당 여당이 있는가. 굳이 말하면 신문은 영원한 ‘야당’이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해서 권력을 비판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언론은 핍박받을수록 더욱 저항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총리의 위험한 언론관이 오히려 언론자유의 새 지평을 여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지는 않을까.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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