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투병 아빠께 드리는 송아리의 사부곡

  • 입력 2004년 10월 21일 19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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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아시아판 10월 11일자 표지 모델은 한국의 여자 프로 골퍼 송아리(18)였다. 타임이 선정한 ‘올해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인에 포함된 그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훨씬 더 알려진 ‘슈퍼 루키’이다.

7세에 골프를 시작해 13세 때 미국골프협회(USGA)가 주최하는 US 걸스 주니어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우승한 그는 지난해 12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사상 처음으로 ‘18세 미만 입회 금지’ 규정의 예외를 인정받으며 역사상 LPGA 최연소 정규 투어 멤버가 됐다.

이달 말 제주에서 열리는 CJ 나인 브릿지 클래식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3일 한국을 방문한 그를 3일 동안 동행 취재했다. 그의 곁엔 아버지 송인종씨(55)가 줄곧 있었다.

1991년 폐암 선고를 받고도 딸에게 헌신적으로 골프를 가르쳐 온 아버지의 투병기간은 송아리가 ‘새로 쓰고 있는’ 골프 역사와 일치한다. 오빠가 배우는 골프를 자신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조르던 당시 5세 꼬마 아리는 “아빠, 넘버원이 될게요”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아버지에게는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5월 미국 뉴욕주 뉴러셸에서 열린 LPGA 투어 사이베이스클래식대회에 참가한 송아리 가족. 왼쪽부터 쌍둥이 언니 나리, 어머니 바니 옹르키엿, 아버지 송인종씨, 아리.

○송아리의 가족사

3월 올해 LPGA 첫 여자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마지막 홀에서 성공시킨 그의 9m 이글 퍼팅은 전 세계 골프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록 선배 박지은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주먹을 허공에 날리며 “예스, 예스, 컴 온”을 다부지게 외치는 그의 모습은 루키 특유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 개인 통산 38승을 올리며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미국 아마추어 랭킹 1위를 지켰으며, 지난해에는 US여자오픈에서 단독 5위에 올랐다. 지금까지의 LPGA 메이저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은 20세19일. 아리에게는 2006년 5월 20일까지 역사를 바꿀 기회가 충분히 남아 있다. 세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미래의 가능성’이다.

그는 1986년 태국에서 한국인 아버지 송씨와 태국인 어머니 바니 옹르키엿(47) 사이에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오빠 찬(21)은 미국 조지아공대 골프팀에서, 아리보다 9분 일찍 태어난 언니 나리는 12월 LPGA 퀄리파잉스쿨을 준비하고 있다.

아리는 지난해 태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택했다. 그는 “아버지 국가의 국적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14일 밤 그들의 숙소인 서울의 한 특급 호텔 커피숍에서 아버지 송씨와 마주앉았다.

―태국과의 인연은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1976년 국산 쌀통을 태국에 팔아볼 요량으로 쌀통 2개를 들고 갔다가 곧 그만두었어요. 대신 중동의 한국 건설업체에 태국 인력을 알선하는 일로 돈을 많이 벌었죠. 직원 수가 200명까지 늘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애들 엄마를 만났습니다. 우리 회사 임원 딸이었지요. 1991년에는 치앙마이에 11층 규모의 별 4개급 호텔을 열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 골프는 어떤 계기로 가르쳤습니까.

“1991년 호텔 막바지 공사 중 자주 기침이 나고 목에서 피가 났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폐암이라는 거예요.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 말에 영정 사진을 찍으러 나리와 아리에게 색동 한복을 입혀 사진관에 갔는데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즐거워했죠. 세상을 뜨기 전에 아이들이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 줘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감성적이고 과학적인 골프교육

송씨는 암세포가 번진 오른쪽 폐를 떼어낸 뒤 철저한 식이요법 등으로 위기는 넘겼다. 그러나 만성 당뇨와 지난해 심장 발작 등으로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공동묘지에 텐트를 치고 야간에 샌드웨지 연습을 시켰다는 박세리 아버지 박준철씨의 스파르타식 교육도 있지만, 송씨의 교육은 보다 감성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아이들의 ‘굿나잇’ 인사를 ‘아빠, 저는 세계 최고가 되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바꾸었다. 호텔 11층 스위트룸에 살면서 다리에 5파운드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오르내리게 했다. 승용차에는 팔 근육을 키우는 완력기 세 개를 두었다.

타이거 우즈의 어머니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녀는 말했다. “아이들이 학업에도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강압적이지 않게 부드러운 접근이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재능이에요.”

그는 정지한 공을 때리는 골프를 극도의 ‘정신 운동’이라고 본다. 보기 플레이어인 그는 초기에는 골프 스코어를 나무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골프의 내용에 집중했다. 스코어가 나빠도 퍼팅이 좋으면 칭찬했다.

자녀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지면 허리띠로 자기 자신을 모질게 때렸다. 자녀의 티칭 코치를 고용하고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공 줍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따로 두었다.

나리, 아리가 11세 되던 1997년에는 보다 나은 골프 교육을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로 이주했다. 교육비 등은 태국의 호텔을 처분해 마련했다.

쌍둥이 자매인 나리와 아리는 서로에게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동행 취재 기간 중에도 아리는 틈만 나면 미국에 있는 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아동심리학 교수를 찾아가 쌍둥이 교육법도 상담 받았다. 못하는 쪽을 위로하고 칭찬하라는 답을 얻었다.

애교가 많은 아리는 취재 기간 내내 자주 아버지 볼에 키스를 했다. “고맙습니다, 아빠.”

아리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은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 간단한 인사말만 하는 수준. 이 점이 아버지로서는 가장 안타깝다. 자신이 태국어를 몰랐다면 집에서 한국어를 썼으리라. 그동안 시간이 아까워 한국어 교육은 뒷전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키웠던 강아지를 한국어 ‘사과’와 ‘김치’라고 불렀다. 아마추어와 프로 리그의 차이점을 영어로 묻자 아리는 의외로 한국어로 대답했다. “(프로는) 돈 있어요.”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서울에 온 아리는 바빴다. 재계 인사들과 골프 라운딩을 가졌고, 협찬사인 제일모직 빈폴의 팬 사인회도 열었다.

각종 인터뷰와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협찬받기 위해 디자이너 지춘희씨의 부티크에 들렀을 때, 지씨는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겠다”며 극찬했다. 물방울무늬의 짧은 원피스를 입어 보자 날씬하게 쭉 뻗은 각선미가 아름답게 드러났다. 가슴이 약간 파인 또 다른 드레스도 썩 잘 어울렸지만 그는 “아빠가 알면 혼난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언과 퍼터는 타이틀리스트, 드라이버는 핑을 쓰는 그는 지금까지 7번의 홀인원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이 갤러리 속에서 커다란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아버지와 주고받은 선물을 물었더니 “아버지는 우리의 ‘1등’을 선물 받고 싶어한다”는 어른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올해 여자 상금 랭킹 28위로 4억원 정도 벌었지만 아버지는 상금 액수로 기뻐하는 낯을 보인 적이 없다.

아리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암 투병을 늘 기억한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을 가눌 힘이 없을 때에도 아빠는 환한 웃음만 보여 주셨어요.”

송씨는 올해부터 프로 리그에서 활동하는 아리의 투어에 동행한다. 아버지의 식이요법을 책임지던 어머니는 나리를 맡았다. 채식 위주로 식사해야 하는 아버지는 최근 아리를 따라다니느라 식생활이 많이 무너졌다.

나이보다 훨씬 의젓한 아리는 아버지를 많이 걱정한다. LPGA 홈페이지에 올리는 아리의 일기에는 아버지 건강에 대한 애절한 마음, 아버지에게 해로운 음식이나 이로운 음식 등에 대한 글이 빼곡하다. 이젠 딸이 아버지의 버팀목이 돼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번에 서울에 와서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어릴 적 아빠에게 드렸던 제 약속을 기억해요. 언젠가는 세계에서 1등이 되겠다고. 열심히 할게요. 그 날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을래요. 사랑해요. 아빠.”

아름다운 아버지와 딸은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을 말없이 가르친다.

▼송아리의 가족▼

○ 송아리(18)

태국에서 출생. 7세 때 골프 시작.

지난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사상 최초의 LPGA 최연소 정규 투어 멤버가 됨. 올해 3월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준우승. 2001∼2003년 미국 아마추어 랭킹 1위. 아마추어

시절 개인 통산 38승. 지난해 한국 국적 취득.

‘차세대 아니카 소렌스탐’이라는 평가.

○ 아버지 송인종씨(55)

전남 출신. 1976년 태국으로 이주. 1991년 태국 치앙마이에 호텔 운영. 1991년 폐암 판정을 받고 오른쪽 폐를 떼어냈으며, 만성 당뇨와 심장 발작 증세를 겪고 있음. 세 자녀를 세계적

골퍼로 길러냄.

○ 어머니 바니 옹르키엿(47)

태국인. 치앙마이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유학.

○ 오빠 송찬(21)

9세 때 골프 시작. 1997년 가족과 함께 미국 골프 유학. 미국 조지아 공대 골프팀에서 활동.

○ 쌍둥이 언니 송나리(18)

아리의 쌍둥이 언니.미국 LPGA 퓨처스투어 우승 1회. 올해 프로 전향. 아마추어 시절 개인 통산 24승. 2000년 US 오픈 최연소 아마추어 최저타상 수상.

글=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사진=강병기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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