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지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과 ‘여성’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면서, 여성작가로서의 제 자세에 대해 여러모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이 벌써 시월의 네 번째 토요일이네요. 올이 두꺼운 모직 스웨터를 입고 집을 나서도, 마음으로 불어드는 스산한 바람이 느껴지는 나날들입니다. 이제 정말 깊은 가을인가 봐요. 이 가을을, 선생님은 어떻게 견디고 계신지요?
언제부터인가, 이맘때가 되면 저는 공연히 가슴 한쪽이 공허해지곤 합니다. 개학 전날, 숙제를 채 마치지 못한 아이처럼 조급해지기도 하고요. 선생님은 웃으실지도 모르지만, 아마 나이 서른 살을 넘기면서부터인 것 같아요. 올 한 해도 또 이렇게 가는구나 하는 그 막연한 불안감을 대체 뭐라고 명명하면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교만하고 또 어리석게도 20대의 저는 시간의 흐름이란 지독하게 더딘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지리멸렬한 청춘의 시간이 지속될 거라 착각했던 거지요.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는 이제야, 시간의 속도가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선생님, 제 친한 친구가 며칠 후에 먼 타국으로 떠난다고 하네요. ‘이민’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곳에 홀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러 가겠다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참 복잡한 심경이 되었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이가 다 그렇겠지만, 제게는 지금 통과하고 있는 제 나이가 참 어중간하게 여겨집니다. 갑작스레 먼 길을 떠나겠다는 그녀에 대해 드는 제 마음은 참으로 이중적입니다. 부럽다는 것, 그리고 불안하다는 것. 물론 아직은 젊은 나이가 분명하니,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면서 살아도 좋겠다 싶어요. 마음먹은 것을 기꺼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그 의지가 부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남들 하는’ 대로 안정된 삶의 과정에 진입하는 것이 세상 살기에 좀 더 편안하지 않을까, 염려를 하다가 문득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그 걱정이, 친구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향한 것인 듯해서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생의 스케줄을 언제나 나이의 문제에 맞추어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늘 자신이 너무 빠르거나 늦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우리 사회 자체가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대번 묻는 말이 “몇 살이세요?”이니까요. 그리고는 “결혼하셨어요?” “아이는?” “둘째 계획은?” 이런 식의 질문이 이어지지요. 몇 살이 넘기 전에 ○○을 해야 한다는 ‘적령기’의 압력이 모든 나이의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얼마 전 스물여섯 살짜리 후배가 지금 문학 공부를 시작해도 괜찮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어 왔던 기억이 납니다. 후배는, 공부는 하고 싶지만 이제 와서 전공을 바꾸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했더랬지요. 그 후배에게 에마 스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일흔두 살에 처음으로 붓을 쥔 뒤, 훌륭한 작품들을 남긴 그 ‘젊은’ 할머니 화가에 관해서 말이에요.
선생님,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열정, 그리고 자신의 생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용기이겠지요? 김승희 시인의 산문집 ‘33세의 팡세’를 꺼내어 읽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강렬하게 집중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시인의 전언이 유난히 와 닿는 서늘한 가을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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