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입력 2004년 10월 22일 17시 16분


1909년 캐나다 서남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발견된 ‘버제스 혈암’에 새겨진 생물종들을 복원한 그림들(일부). 버제스 혈암은 캄브리아기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다양한 생물종들의 화석이 남아 있는 산악지대의 암석이다. 워낙 보존상태가 좋아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유용하다. 사진제공 경문사
1909년 캐나다 서남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발견된 ‘버제스 혈암’에 새겨진 생물종들을 복원한 그림들(일부). 버제스 혈암은 캄브리아기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다양한 생물종들의 화석이 남아 있는 산악지대의 암석이다. 워낙 보존상태가 좋아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유용하다. 사진제공 경문사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528쪽 2만5000원 경문사

생물학의 주제들을 대중적 글쓰기로 풀어내 명성을 얻었던 스티븐 제이 굴드(1941∼1992)가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화가 곧 진보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저자가 소재로 삼은 것은 1909년 캐나다 서남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발견된 ‘버제스 혈암’(암석의 일종). 대빙하기 이후 찾아온 캄브리아기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다양한 생물종의 화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캄브리아기 폭발 이후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물들은 5%에도 못 미치는데 버제스 혈암의 화석들은 워낙 보존 상태가 좋아 고대부터 지금까지 생명의 다양성과 진화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었다.

고생물학자들은 이 화석을 둘러싸고 80여년에 걸쳐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결국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생물종의 진화가 어떤 방향성을 향해 가는 진보의 과정이냐, 아니면 우연의 연속이냐 하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주자는 월코트. 그는 생물이 ‘거대한 설계도’에 따라 자연에 적응하면서 단세포→다세포→파충류→포유류의 단계를 지나 인간으로 성장하는 필연적이고 진보적인 과정이 진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굴드를 포함한 이후의 학자들은 이런 필연이 아니라 ‘우연’을 진화의 주된 동력으로 보았다. 즉 생물은 생태계가 안정된 평형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의 진화하지 않다가 빙하기, 운석 충돌 등으로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진화하거나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적자생존(適者生存)은 생명의 복잡성을 이끌어 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진보가 아니라 다만 진화에 따른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상반된 관점은 그렇다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인문학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월코트와 같은 점진적 진화론자들의 생각이 이른바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의 주장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적자생존이 진보를 향한, 자연의 거대한 설계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기 때문에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은 19세기 인종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자유방임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버제스 혈암에서 발견된 수십억년 전 초기 생물들의 놀라운 다양성과 그 이후의 진화 양상에 대한 논증을 통해 생명에는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계획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능을 가진 존재, 즉 호모사피엔스가 태어났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인간)는 아프리카의 작은 개체군에서 불안한 출발을 한 후, 운 좋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전 지구적 경향이 낳은 산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과학자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객관성의 전형이고,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오직 증거의 무게와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만 결론에 도달한다는 낡은 신화를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 우리는 편견, 선호, 사회적 가치, 심리적 태도 등이 모든 발견의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과학은 자료와 선입관 사이의 복잡한 대화이다.’

원제는 ‘Wonderful Life’(1998년).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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