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김미진]샤갈처럼 거꾸로 보기

  • 입력 2004년 10월 28일 18시 42분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넉 달여 동안 열렸던 마르크 샤갈 전시회가 지난주 끝났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 중에서도 영순위로 꼽히는 작가인 만큼 전시기간 내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샤갈의 작품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까. 그의 작품은 쉽다. 따사롭다. 그리고 재미있다. 하지만 이 정도 이유만으로 이토록 큰 대중적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것일까.

▼‘이즘’에 물들지 않은 순수▼

샤갈의 작품은 20세기의 난해한 미술 담론을 초월해 쉽게 이해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관객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반면 미술사가에게는 “피카소나 미로 등 거장들에 비해 뚜렷한 미술사적 보루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20세기는 수많은 유파의 홍수였다. 빠르게 밀려왔다 꺼져버리는 허망한 세기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파도가 스러진 그 자리에 샤갈이 남아 있다. 그것은 무수한 ‘이즘’이나 형식의 굴레를 넘어선 한 예술가의 순수한 항거이며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20세기의 수많은 미술양식에서 함몰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이며 또한 행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1887년 러시아의 중소도시인 비텝스크의 변두리 유대인 마을에서 9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신앙심이 돈독했던 아버지는 큰아들이 화가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화가가 되면 형상을 그릴 수밖에 없으므로 ‘우상(偶像)을 섬기지 마라’는 유대교의 계명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동네 화가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그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동네 어귀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내 아들이 훌륭하다는 것을 믿는다”라며 그에게 강한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의 작품에는 고향에 대한 추억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따스한 사랑과 믿음으로 감싸였던 어린 시절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풍요롭고 감미롭다. 어둡지만 행복했던 유대인 마을에 대한 회상은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데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 삶의 단면이 형상화된 것이다. 마을의 음산한 풍경은 가난과 불안에 떨어야 했던 유대인 공동체의 특유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집안 모습이나 사람들의 형태는 늘 따사로운 정감을 느끼게 한다.

20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가 사이에 둘러싸였다. 그는 야수파를 보았고 피카소의 입체파를 만났으며, 순수 색채를 주장하는 오르피즘의 대가 들로네를 사귀었다. 그의 작품에는 이들에게서 받은 영향뿐만이 아니라 반 고흐의 표현주의와 고갱의 종합주의, 초현실주의자의 상상력이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자양분을 흡수했지만 거기에 함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샤갈을 보고 느끼고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경험이다. 샤갈의 그림에는 색채의 유희와 고도의 상징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다. 저 깊숙이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 속에 숨겨진 추억과 순수의 향수를 자극하는 독특하면서도 달콤한 향기 같은.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의 유랑의식은 그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무중력의 환상적 풍경으로 표현됐다. 자연주의적 원근법 공간에서 해방돼 공중을 날아다니는 염소와 곡예사와 연인들. 그것은 높은 곳도 낮은 곳도 아닌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꿈인지도 모른다. 샤갈은 이렇게 충고한다. “어떤 그림이라도 좋으니 거꾸로 놓고 보세요. 그렇게 하면 그 진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혼탁할수록 한발 물러서야▼

요즘 우리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 와중에 각양각색의 주의 주장이 난무하는 혼탁한 상황이다. 각자 서로의 주장만 옳다고 하고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한발 물러서 자신의 주장을 뒤집어 본다면 어떨까. 샤갈처럼 시대에 영합하지 않고, 어떤 이즘이나 유파에 중독되지 않고, 현실에서 살짝 한발을 떼고 거꾸로 본다면, 이 험난한 세상이 조금은 더 새롭고 또렷하게 보이지 않을까.

김미진 객원 논설위원·소설가 usedrea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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